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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공포와 광기의 평양을 바꾸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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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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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논설실장

개성공단을 폐쇄한 북한 조평통의 성명은 거칠기 짝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을 헐뜯는 표현이 입에 담기 힘들 정도다. ‘아이도 낳지 못해 모성애까지 메말라버린 ○○○년’ ‘청와대 촌닭’ ‘머저리’라고 했다. 아마 김영철 통전부장이 김정은에게 맹목적 충성심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다. 요즘 김정은 앞에서 쩔쩔매는 북한 2인자들은 놀랍기만 하다. 황병서 총정치국장은 무릎을 꿇고 손으로 입을 막으며 보고한다. 최용해 비서도 마찬가지였다. 김정은이 나이 든 간부들의 보고 때 입 냄새가 나거나 침 튀기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다. 노동당·호위사령부 출신인 정치 군인들의 생존 비결이다.

인터넷 등으로 외부 정보 확산시켜
주민의 신앙·존경심부터 흔들어야

 이런 삶의 지혜를 모르는 야전 출신 군인들은 파리 목숨이다. 인민무력부장은 평균 8개월마다 잘린다. 군 서열 3위의 총참모장은 더 비참하다. 이용호→현영철→김격식→이영길 가운데 병원에서 사망한 김격식을 제외하곤 모두 처형당했다. 국가정보원 고위 관계자는 “궁예의 관심법(觀心法)처럼 김정은도 즉흥적 기분에 따라 숙청하고 있다”며 고개를 흔든다. 평양이 공포와 광기에 짓눌려 있는 것이다.

 냉정하게 보면 한국의 외교안보 라인도 강경파 일색이다. 김관진 국가안보실장, 이병호 국가정보원장 등 군 출신이 대부분이다. 개성공단 중단, 사드 배치 등 중요 현안들도 청와대가 직접 결정하는 모양새다. 박 대통령 스스로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며 강경 방침을 주도하고 있다. 남북 모두 제대로 된 참모는 사라지고 최고 지도자들의 눈치만 살피는 분위기다.

 물론 북핵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어느 때보다 국제 제재가 먹혀들 가능성이 큰 것도 사실이다. 우선 북한 경제부터 어렵다. 수출의 40%를 차지하는 무연탄 값이 폭락했다. 여기에다 이란·쿠바 사태를 마무리 지은 미국이 본격적으로 회초리를 꺼내 들고 있다. 트럼프와 힐러리 등 대선 후보들도 “북한을 손보겠다”는 입장이다. 위안화가 핫머니 공격을 받고 있는 중국 역시 미국의 눈치를 살펴야 할 신세다. 미 재무부가 “무역흑자가 5000억 달러인데 환율을 조작하느냐”고 압박하면 재앙을 피하기 어렵다. 러시아도 유가 폭락으로 북한을 도울 힘이 없다.

 하지만 강공책으로 북한을 변화시킬까. 어느 독재체제도 외부 압박만으로 무너진 경우는 드물다. 이쯤에서 지난해 1월의 한 인터뷰는 참고할 가치가 있다. “북한은 지구상에서 고립되고 가장 제재를 많이 받는 나라다. 군사적 해법은 답이 아니다. 북한은 100만 명의 병력에다 핵 기술과 미사일을 갖고 있다. 인접한 동맹국인 한국이 피해를 본다. 오히려 인터넷 등으로 북한 내부에 침투해 외부 정보를 확산시키는 게 지름길이다.” 이 답변의 주인공은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다. 그는 정보위성과 감청 등을 통해 북한 내부의 고급 정보를 가장 많이 아는 인물이다.

 따지고 보면 북한은 김씨 일가를 유일신으로 받드는 종교 국가나 다름없다. 여전히 주민들은 봉건시대에 살고 있다. 조선시대-일제식민지-공산독재를 거치면서 한번도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했다. 북한이 국제 제재로 돈이 없어 붕괴될 것 같지는 않다. 수십만 명이 굶어 죽는 고난의 행군까지 경험했다. 어쩌면 북한의 변화를 유도할 길은 따로 있는지 모른다. 북한의 가장 큰 공포는 신앙심이 흔들리는 것이다. 최고 존엄에 대한 존경심이 무너지는 것이다. 북한이 기를 쓰고 ‘비방·중상’이라며 대북확성기 방송을 차단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북정책에도 사이클이 있다. 제재 국면에선 미·중의 공조를 이끌어내 최대한 북한을 압박하는 게 맞다. 하지만 길게 보면 ‘개성공단 그 이후’도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북한과 접촉면을 늘려 장마당·인터넷·휴대전화를 통해 외부 정보가 자유롭게 흐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북한 주민들에게 “왜 우리는 남한·중국보다 못살까”라는 의문을 갖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평양에 달러보다 독재정권에 대한 신앙심부터 고갈시키는 게 통일의 지름길이 아닐까 싶다.

이철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