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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섣부른 덕수궁 돌담길 잇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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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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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논설위원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서울 최고의 산책로라는 덕수궁 돌담길. 이 낭만의 길을 따라 걸으면 미술관 앞 로터리 한쪽에서 애틋한 ‘광화문 연가’ 노래비와 만나게 된다.

 노래가 발표된 1988년 전부터 이곳은 연인들의 거리였다. 54년에 나온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에도 “덕수궁 담 뒤 영성문 고개는 사랑의 언덕길”이란 대목이 나온다. 담장 밖으로 뻗은 울창한 나뭇가지로 이 길은 자연적인 터널이 됐다. 그래서 “이목을 꺼리는 젊은 남녀가 이곳을 찾았다”는 거다.

 하지만 이 길엔 “함께 걷는 연인은 곧 헤어진다”는 불길한 전설도 전해 온다. 정확한 유래는 알 길 없지만 옛 가정법원이 근처여서 이혼 부부들이 이 길로 걸어왔기 때문인 듯하다. 승은(承恩)을 얻지 못한 덕수궁 후궁들의 한이 작용한 탓이란 설도 있다. 어쨌거나 정동교회·중명전 등 운치 있는 건물이 부근에 모여 있어 최고의 산책로임엔 틀림없다.

 이렇듯 아름다운 돌담길이건만 궁을 한 바퀴 돌 수는 없다. 북쪽 담장에 붙은 영국대사관이 막고 있는 탓이다. 이에 서울시는 2년 전부터 대사관 부지 일부를 넘겨받아 새 통로를 내는 사업을 추진해 왔다. 지난해 5월에는 대사관과 사업 추진 양해각서까지 썼다.

 하지만 넘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통행로를 만들려면 대사관 건물 일부를 헐고 방탄유리 등 보안장치를 완비해야 하며 비용은 시에서 모두 대야 한다. 대사관 측은 지난해 10월 본국 전문가들을 불러 잠정비용을 뽑았더니 예상을 훨씬 넘는 거액이 나왔다고 한다. 게다가 “부지 양도 여부는 외무부 본부에서 판단할 일로 결정된 게 없다”는 게 대사관 설명이다.

 그런데도 서울시 일부 관계자는 “예산 28억원이 배정됐다”며 다 된 것처럼 말한다. 지난 10일에는 돌담길을 중심으로 ‘대한제국의 길’을 만들겠단 계획까지 나왔다.

 하지만 영국 측은 “언론에 보도된 액수는 일부에 불과하다”고 밝히고 있다. 돌담길 170m를 복원하는 데 100억원 넘게 들지도 모른다. 이토록 많은 혈세를 쓸 일이면 시민들 뜻을 묻는 게 백번 옳다.

 일각에서는 새 길 대신 덕수궁 뒤쪽 포덕문과 영국대사관 앞 북쪽 문을 개방해 돌담길 안쪽으로 걷게 하면 별 비용 없이 궁 주위를 돌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분명한 건 132년 만의 돌담길 연결도 좋지만 손익부터 확실히 따져야 한다는 거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