벵골만 삼킨 대영제국, 양곤을 정치·상업적 허브로 삼다

중앙선데이

입력 2016.02.14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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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6호 14면

1 미얀마 양곤은 인도양에서 깊숙이 들어온 강항(江港) 도시다. 멀리 컨테이너 부두와 부처님의 머리카락을 모셨다는 전설이 있는 보타타웅 파야(오른쪽 점선원 안), 선착장이 양곤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2 영국 식민지시대 건물이 많은 양곤 시내 곳곳에 현대식 고층빌딩 공사가 한창이다. 3 2012년 종교 갈등으로 폭동이 일어났을 때 폭탄이 터졌던 라카인주 시트웨의 이슬람 자마모스크. [사진 주강현]

미얀마와 인도 북서부 중심지인 콜카타, 방글라데시의 다카와 치타공은 ‘벵골만 황금 트라이앵글’을 이룬다. 해양 실크로드 문명 대탐사대는 믈라카 해협에 이어 벵골만을 찾아 나섰다.


먼저 탐사대가 방문한 미얀마의 항구들은 주로 해항(海港)이 아니라 강항(江港)이다. 서울도 기본적으로는 서해에서 한강을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자리 잡은 일종의 강항이라고 할 수 있다. 미얀마 강들은 동고서저에 따라 서쪽 벵골만으로 흘러간다. 따라서 북서쪽이 고산준령으로 가로막힌 미얀마는 전적으로 벵골만 영향권이다.


한국인에게 벵골만은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벵골만은 곳곳에 델타(삼각주)를 형성하고 있으며 안전 항구를 만들어 내는 천혜 요충지다. 첫 기착지는 미얀마 최대 도시인 양곤. 미얀마 북부의 작은 촌락 출신으로 정복전쟁을 통해 ‘통일 버마’를 성취한 알라웅파야왕은 1755년에 마침내 이곳에 도읍을 건설했다. 미얀마 남부를 장악했던 몽족이 11세기에 건설했던 다곤은 양곤으로 바뀌었다.

1925년 런던에서 초판이 나온 『버마사(史)』에서 역사학자 하비(G. E. Harvey)는 1824년 3월 10일을 ‘영(英)제국 정복의 출발일’로 규정했다. 이후 2차 앵글로-버마전쟁(1852년)으로 영국은 양곤과 남부 미얀마를 점령했으며, 양곤은 제국 영국의 상업적·정치적 허브가 되었다. 도시를 접수하자 이름조차 랑군으로 바꾸고, 양곤을 전략항구로 키워 내면서 대대적 식민지 건설에 착수했다.


전략적으로는 동인도회사에 고용되었던 인도 용병이 일으킨 사실상의 첫 번째 인도독립전쟁이었던 세포이반란(1858년) 이후 당시 인도를 지배했던 무굴제국 황제 샤 2세를 식민지 수도로 쫓아 보냈다. 탐사대는 양곤 시내에 위치한 ‘마지막 황제’의 무덤을 찾았다. 그의 시신은 지하 어딘가에 암장되듯이 묻혀 있었고, 후대 사람들이 그 위에 묘와 소박한 성전을 만들었다. 벵골만을 주름잡은 대영제국 팽창의 파장이 양곤에 미쳤다는 증거다.


영국은 당시 랑군을 베이스캠프로 제3차 전쟁(1885)을 치르면서 북부 미얀마까지 차지한다. 인도 콜카타로부터 직선거리에 양곤이 위치하며, 랑군에서 영국이 만들어 낸 식민도시 페낭을 거쳐 믈라카와 싱가포르에 닿는 제국의 노선이 안정적으로 확보된 것이다. 식민경영자들은 이들 항구도시를 ‘해협주(海峽州)’라 불렀다. 해협주는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와 동남아 바다를 양분 지배했다.

4 므라욱우 왕조의 수도로 번성했던 므라욱우를 묘사한 그림. 5 영국 식민지시대 당시 양곤의 불교성지인 쉐다곤 파야를 배경으로 발레공연을 하고 있는 모습.

불교와 영국 식민 유산 병존하는 양곤 양곤은 기본적으로 불교유산과 영국 식민유산이 병존한다. 시내 중심가의 랜드마크인 불탑(佛塔) 술레 파야(파고다)에선 일직선으로 양곤강으로 나아갈 수 있다. 술레 파야가 2200여 년 역사를 자랑하는 것으로 보아 벵골만을 가로지른 불교 전래의 궤적을 확인할 수 있다. 양곤강변 보타타웅 파야에는 인도로부터 2000여 년 전 부처님 머리카락을 옮겨와 모셨다는 설화도 있다. 이 모든 흔적은 인도-미얀마 해양문명 교류의 구체적 예증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서울 광화문 사거리쯤은 될 법한 술레 파야 주변은 영국인이 설계한 격자 형태의 거리로 반듯반듯하다. 웅장한 식민지 시대 유산인 시청 건물부터 근대식 마하반둘라 공원, 한때 ‘동양의 헤로스 백화점’으로 불리던 옛 이민국 건물, 1830년에 만들어진 이마누엘 침례교회, 18세기 초 앤 여왕 시대 건축양식의 고등법원 청사 등 이들 콜로니얼 양식 건물들은 대영제국의 힘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강가로 나가면 스트랜드 로드를 따라 이오니아식 석주가 이어지는 건물군이 나온다. 미야와디은행·세관·항만공사·중앙우체국·내륙수로개발공사 등 즐비한 식민지 건물군 중에서 단연 귀에 익은 건물은 스트랜드 호텔. 1901년 문을 연 이 호텔은 싱가포르 래플스 호텔과 페낭의 이스턴, 오리엔탈 호텔을 소유한 사키스 형제의 공동소유물이다. 제국의 뱃길을 따라 호텔조차도 ‘랑군-페낭-싱가포르’로 이어진 것이다.


스트랜드 호텔은 러디어드 키플링, 조지 오웰, 서머싯 몸 등 대문호들이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 1903년 앵글로인디언(인도에서 태어난 영국인)으로 태어난 오웰은 당연히 랑군을 드나들기도 하고, 남부 식민항구 몰라먀인에서 경찰관 노릇도 했다. 그의 소설 『코끼리를 쏘다』 등에는 당대 ‘식민지 미얀마’의 세태와 더불어 ‘제국주의가 신민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조차도 죽이는’ 과정이 참담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문호들도 ‘제국의 바다’를 유랑하면서 결과적으로 제국주의 팽창 시대의 ‘신문명’ 동서교류를 경험한 셈이다. 므라욱우에는 유럽인 집단거주지 존재 탐사대는 양곤에서 기수를 북쪽으로 돌렸다. 관광객은 대체로 중부 바간과 만달레이의 불교유산을 찾아다닌다. 그러나 우리가 방문한 북서부 라카인 주에는 미얀마 해양사의 숨겨진 보고가 숨겨져 있다. 라카인은 역사적으로 아라칸이라 불리던 무슬림이 많이 살던 곳. 탐사대는 양곤에서 라카인 주도인 시트웨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다시 육로로 므라욱우로 향했다. 1430년부터 1784년까지 354년간 라카인의 수도였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손꼽히던 므라욱우.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대체로 시트웨에서 칼라단강을 거슬러 오르는 뱃길로 찾아 들어간다.


므라욱우 역시 강항도시였다. 이 도시가 개설되고 얼마 되지 않아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었다. 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 등에서 들어온 흔적이 남아 있다. 므라욱우의 고고학박물관에서 포르투갈 유물을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다. 일종의 자유무역항이었다. 17세기에 이 강항도시를 찾았던 예수회 수사 파리나(A. Farinha)는 ‘제2의 베니스’란 헌사를 바쳤다. 궁궐 남쪽의 강변에는 다잉지 팟이라 부르는 유럽인 집단거주지가 존재했다. 나중에 들른 시트웨박물관에서는 황금시대를 그린 재미있는 그림을 발견했다. 높고 기다란 성벽, 솟구친 궁궐과 사찰 건물들, 강가에 밀집한 엄청난 규모의 살림집, 코끼리부대, 심지어 낙타 떼까지 보인다. 서양인이 그렸을 법한, 외국인 거주지로 보이는 앞의 주택군을 부각시킨 이 그림에서 므라욱우를 ‘제2의 베니스’라 칭송한 헌사가 ‘허사’가 아님을 확인한다.


이 강항도시는 인도와 아랍의 강력한 영향도 받고 있었다. 므라욱우 고고학박물관에서는 시바 여신의 남근을 두루 만날 수 있다. 아랍계 유리와 타일도 꽤 많다. 이슬람 세력은 라카인 해안으로부터 강을 거슬러 올라 이 일대까지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다. 박물관에서는 중국 수입 도자기도 다수 눈에 들어온다. 양곤 시내 강가의 스트랜드 호텔 근처에 오래된 중국 사찰 경복궁이 있고, 대항해의 여신인 마조가 모셔져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인의 미얀마 정착 역시 오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쇼군(將軍)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 포르투갈 사람을 따라 ‘망명’해온 나가사키(長崎)의 사무라이들이 한때나마 국왕의 호위무사였다는 사실이다. 왕국의 위엄 내세우기용으로 이국적 사무라이를 경호부대에 편성했을 법하다. 므라욱우 전성시대인 민빈왕(1531~53) 때는 1만 척 해군함대를 거느리며 벵골만과 오늘의 양곤 앞바다인 마르타반을 지배했기에 이러한 국제적 경영이 가능했을 것이다.


탐사대는 므라욱우 북부지구의 싯타웅 파야를 찾았다. ‘8만 불상의 성전’이란 곳이다. 민빈왕이 1535년 건립했다. 라카인의 역사가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중요한 유적이다. 인도와 미얀마의 오랜 연결점이 산스크리트에서 확인된다. 라웅반파욱파야를 찾아가니 외벽에 커다란 꽃 모양의 이슬람식 유약타일이 보인다. 타일은 기본적으로 이슬람 문명의 흔적이다. 이슬람 문명이 바다를 건너 강을 따라 융합된 결과일 터. 해양문명의 본질은 다양한 중첩적 세계바다로 연결된 강을 따라 곳곳에 오랜 시간의 풍화작용이 흔적을 남겼다. 므라욱우 앞에 다냐와디(1~6세기), 웻탈리(3~11세기), 렘로(11~15세기) 세 왕조가 초석을 깔았다. 탐사대가 므라욱우 초입의 웻탈리 사찰에 들어서자 ‘AD. 327’이라고 쓰인 입간판이 마중한다. 벵골만을 건너온 고대의 흔적이 시골 구석에 이런 식으로 남아 있다. 므라욱우를 포함한 이들 네 왕조는 불교·힌두교·이슬람교의 융합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이후 만달레이 중심의 미얀마 왕국에 포섭되어 이른바 불교국가로 이름이 나게 되었으나 그 근본은 역시나 해양문명의 본질이 의미하는 바 다양한 중첩적 세계였다.


미얀마는 기본적으로 100개가 넘는 다수 종족이 포진한 뜨거운 용광로다. 이전 명칭 ‘버마’는 버마족을 상징하기에는 충분하나 그 외 다양한 종족을 포괄하기에는 부족할뿐더러 부적절하기까지 하다. 므라욱우를 창건한 세력도 오늘의 다수 종족이 아니다. 므라욱우에서 조금만 더 가면 친(Chin)족이 거주하는 친주(州)가 있고, 그 너머에 소수민족의 보고인 중국 윈난(雲南)성이 버티고 있고, 태국의 치앙마이와 베트남 고산족이 잇닿아 있다. 미얀마의 다양한 소수민족 분리운동이나 태국 남부 말레이반도 무슬림의 분리운동은 현실적 다민족과 국민국가가 충돌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탐사대는 그날로 네 시간여 차를 달려 시트웨로 돌아왔다. 강가에는 맹그로브 숲이 그대로 살아 있다. 자연생태의 보고이자 허파인 맹그로브 숲 사이의 수로를 관통해 문명의 보고와 허파가 만들어진 것이다. 라카인을 접수한 영국은 므라욱우의 주도를 한적한 어촌이었던 시트웨로 옮기고 신도시를 건설했다. 시트웨는 라카인강을 거슬러 올라 므라욱우로 향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또한 벵골만으로 갈리는 절묘한 꼭짓점이다.


시트웨 시내 자마모스크를 찾았다. 모스크는 철벽을 두른 채로 출입금지다. 이곳에선 2012년 폭탄이 터졌다. 무슬림이 라카인족 여성을 성폭행한 개인적 사건이 촉발한 폭동은 폭탄테러로 이어졌다. 라카인 무슬림은 자칭 ‘로힝야’라 부르고 있다. 무슬림에 대한 군사정권의 탄압은 너무도 혹심해 ‘미얀마 국민이지만 국민이라 스스로를 부를 수 없는’ 비(非)국민종족을 만들어 내고 있다.


모스크와 담 하나 사이에 두고 라카인주 문화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콘텐트 상당 부분이 소수민족의 이야기다. 박물관 옆으로는 중앙시장이 있다. 시장에서 만나는 이들도 한결같이 ‘미얀마’ 하나로만 부르기에는 복잡다양성을 갖추고 있다. 검은 피부도 자주 눈에 뜨인다. 미얀마, 특히 북부 해안가는 ‘종족 박물관’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시트웨 남쪽으로 내려가 태국과 국경을 접하는 말레이반도의 해안가에는 전혀 다른 종족이 살고 있다. 숨겨진 보석으로 남겨진 미에익군도의 소수민족은 북쪽 삶과는 또 다르다. 남쪽 말레이반도와 태국 남부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영향권이다. 미얀마를 ‘불교국가’로만 단순 규정지을 게 아니다. 시트웨에서 조금만 북상하면 방글라데시 치타공이 나오며, 여긴 전적으로 무슬림의 땅이다. 벵골만 무슬림의 존재는 바로 머나먼 항해를 거쳐 온 해양세력에 관한 이야기다. 이렇듯 미얀마 바닷길은 종족과 종교의 ‘융합물과 폭발물’을 동시에 나르던 역사의 동력이었고, ‘유랑하며 탄압받는’ 로힝야족 문제를 포함해 그 역사적 진척 과정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asiabad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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