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The New York Times

인종차별 아카데미상, 전면 거부하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기사 이미지

록산 게이 미국 퍼듀대 교수

새해가 왔다. 올해도 아카데미상 수상 후보가 발표됐다. 한데 흑인은 2년 연속 주요 상 후보에 한 명도 오르지 못했다. 놀랄 일이 아니다. 할리우드엔 명백히 인종차별이 존재해 왔다. 언제나 그랬다. 영화산업은 유색인종 배우나 감독은 물론 관객도 지속적으로 무시했다. 다양한 인종을 등장시켜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를 보면 유색인종 무시가 영화계에 답이 될 수 없다는 게 분명해진다. 유색인종 관객들 역시 자신의 삶을 대변하는 영화가 보고 싶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사실을 영화계는 무시한다. 우리 삶을 반영하는 영화를 보여 달라는 건 그리 과도한 요구가 아닌데도 말이다.

할리우드, 백인 편애 위험 수준
오스카 투표인단 백인으로 도배
아카데미 시상식 참석 거부하고
백인 일색 영화 막아야 개혁 가능

나는 지독하게 영화를 좋아한다. 영화는 내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안기고, 끝없는 즐거움을 준다. 현실에서 도피하는 출구를 제공하고, 작가인 내가 성취하고픈 예술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 안에서 나를 닮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때 영화를 향한 열망이 꺾이는 걸 느낀다.

뉴욕의 널찍한 아파트에 살며 연애만이 관심사인 늘씬한 백인 미녀 영화는 흥미가 가지 않는다. 가족을 죽인 원수에게 복수하는 백인 남자 영화도 관심이 없다. 유색인종인 내 머리 위를 막고 있는 할리우드의 천장은 보이진 않지만 강철처럼 단단하게 버티고 있다.

2012년 투표권을 가진 아카데미 회원의 94%는 백인이었다. 그중 77%가 남성이었다. 2011년부터 지금까지 제작된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 중 유색인종은 10.5%에 그쳤다. 작가가 유색인종인 영화도 7.6%에 머물렀다.

기사 이미지

그런 만큼 올해 발표된 아카데미상 후보를 보고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지겹게 겪었던 일이지만 라이언 쿠글러가 감독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것, ‘크리드’에서 열연한 마이클 B 조던이 남우주연상 후보에서 낙마한 것을 보며 실망을 금치 못했다. 두 사람이 후보에 올랐다 해도 명단의 대다수는 백인투성이였을 거란 생각에 좌절감마저 느꼈다.

그래도 희망은 있을지 모른다. ‘백인 잔치’란 비난이 쏟아지자 아카데미위원회는 개혁을 다짐했다. 2020년까지 여성과 유색인종 투표단 수를 두 배로 늘리는 한편 투표권을 가진 기성 회원들을 10년마다 재평가해 기준 미달자는 탈락시키겠다는 것이다. 아카데미가 문제의 존재를 인정한 점에선 의미가 있다. 그러나 개혁이 실행에 옮겨질 때까지 할리우드의 인종차별은 계속될 것이다.

올해 아카데미 후보가 발표된 직후 로버트 레드퍼드는 “(인종차별 논란에) 굳이 집중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영화를 위한 노력”이라고 했다. 그는 이미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그러니 인종차별에 대해 신경 쓸 일이 없을 거다. 올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샬럿 램플링은 한술 더 떴다. “(인종차별) 논란은 결국 백인에 대한 역차별”이라며 “모든 곳에서 소수 인종을 무조건 많이 뽑아야 하나?”라고 반문한 것이다. 나야말로 “당신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반문하고 싶다. 흑인 배우들에게 “인내심을 가지라”고 충고한 마이클 케인도 실망스럽긴 마찬가지다.

그는 “나도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오스카를 받았다”며 “연기는 별로지만 흑인이란 이유만으로 캐스팅할 수는 없다”고 했다. 궤변에 불과하다.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얘기를 “함량 미달 배우를 억지로 써라”는 주장이라고 우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할리우드에도 양심의 목소리는 남아 있다. 감독 스파이크 리와 배우 윌 스미스·제이다 핀켓 스미스 부부는 아카데미의 인종차별을 항의하는 뜻에서 시상식 참석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의미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런다고 아카데미가 타격을 입을 것 같지는 않다.

근본 문제는 유색인종을 무시하는 아카데미 투표인단이 아니다. 이들은 왜곡된 할리우드의 거대 영화산업 가운데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진짜 문제는 할리우드에 유색인종 감독이나 배우가 충분치 않으며 이들의 작품도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수자인 유색인종이 권리를 찾으려면 우선 스스로 싸워야 한다. 유색인종 영화인들이 할리우드의 인종차별 실태를 집요하게 고발해야 하는 이유다. 할리우드의 백인 영화인들도 특권에 도취되지 말고 함께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인터뷰에서 인종차별 비난 코멘트를 한두 마디 던지고 지나가는 걸로 그치면 안 된다. 할리우드에 다양성이 정말로 부족하며, 이런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고 강조해야 한다. 백인 영화인들도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이콧해야 한다. 제작진이 온통 백인으로 구성된 영화는 시나리오 단계에서 거부해야 한다. 아니, 그에 앞서 이런 영화를 기획한 제작사부터 보이콧해야 한다.

유색인종이 기획한 영화의 제작·배급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보이콧할 대상이다. 이들의 뇌리엔 “백인 아닌 인종의 삶은 표현할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똬리를 틀고 있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할리우드에 이렇게 강경한 행동을 하자고 제안하는 게 달갑지는 않다. 그러나 이는 할리우드의 자업자득이다.

록산 게이 미국 퍼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