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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달 새 21 마리 감전사, 독수리 ‘킬링필드’된 장단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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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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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주변 민통선 안에 있는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거곡리.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3㎞에 위치한 이 일대는 장단반도로서 세계 최대 규모의 독수리 월동지다.

매년 700여 마리 겨울 나는 곳
이번 겨울 들어 갑자기 떼죽음
고압선에 앉았다가 감전된 듯
군부대 잇단 정전, 안보 구멍도
한전 “전선 피복 더 두껍게 할 것”

이번 겨울 들어 이곳에서 21마리의 독수리가 잇따라 감전사로 추정되는 떼죽음을 당했다. 안전해야 할 월동지가 독수리들에게 ‘킬링필드’가 된 셈이다.

특히 독수리 감전으로 인한 정전 사고가 반복되면서 전방 군부대의 폐쇄회로TV(CCTV) 등 전자감시장비가 시도 때도 없이 작동을 멈추고 있다. 단순히 안타까운 독수리 떼 사망 사고 차원을 넘어 국가 안보에도 상당한 구멍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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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부근 장단반도에서 감전 사고로 숨진 채 발견된 독수리들. [사진 한국조류보호협회, 중앙포토]

장단반도는 63년 전 6·25전쟁의 포성이 멎은 뒤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 자연생태계가 잘 보전돼 있다. 이곳엔 세계적 희귀 조류인 독수리 700∼1000마리가 매년 겨울이면 날아와 월동한 뒤 이듬해 3월 말 몽골과 시베리아 등지의 추운 지방으로 돌아간다. 천연기념물 243-1호인 독수리는 세계적으로 멸종 위기에 놓인 희귀 조류다.

현재 장단반도에는 700여 마리의 독수리가 지난해 11월 말부터 월동 중이다. 문화재청·파주시·한국조류보호협회가 매주 한 차례 먹이주기 활동을 벌이고 있다. 2일 오전엔 죽은 어미돼지 2마리와 새끼돼지 50마리를 먹이로 줬고 700여 마리의 독수리가 몰려들어 온종일 배를 채웠다.

한국조류보호협회와 파주시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지난해 12월 18일을 시작으로 지난달 29일까지 10차례에 걸쳐 한 번에 1∼5마리씩 모두 21마리의 독수리가 전봇대와 전깃줄 아래서 죽은 채 발견됐다. 모두 월동지 먹이터 반경 500m 이내 지역이다.

한갑수(63) 한국조류보호협회 파주시지회장은 “죽은 독수리는 대부분 속깃털이 검게 타거나 발목 등이 터진 상태여서 감전사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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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장단반도 하늘을 비상 중인 독수리. [사진 한국조류보호협회, 중앙포토]

지난달 29일 발견된 2마리 가운데 한 마리는 아랫배가 터져 파주시 동물병원에서 응급수술을 받았지만 5일 만에 죽었다. 김성만(70) 한국조류보호협회장은 “독수리가 집단 폐사한 곳 주변 군부대에서 정전사고가 발생한 점으로 볼 때 감전사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독수리 떼죽음으로 파주 지역 전방 군부대에도 비상이 걸렸다. 관할 육군 모 부대에 따르면 이번 겨울 들어 10여 차례 독수리로 인한 정전사고가 발생해 전자감시장비가 작동을 멈췄고 한전 측이 응급 복구작업을 벌였다. 부대 관계자는 “한전 측에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계속 요청하고 있지만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조류보호협회에 따르면 장단반도 일대에서는 2004년 12월 숨진 독수리 가운데 한 마리가 2만2000V 고압선 전봇대 변압기에 걸린 채 발견되고 주변 지역에 정전이 발생하는 등 18마리가 겨울철에 떼죽음을 당했지만 이후에는 비슷한 현상이 관찰되지 않았다.

파주시도 독수리 집단 폐사의 정확한 원인 조사와 대책 마련에 나섰다. 박찬규 파주시 문화관광과장은 “최근에는 고압 송전선로가 추가 조성된 것도 없는데 10여 년 만에 갑자기 독수리 감전과 정전 사고가 잇따르는 것은 기현상”이라고 말했다.

백운기(54·동물학 박사) 국립중앙과학원 연구진흥과장은 “천연기념물이면서 국제적인 희귀 조류인 독수리의 월동지 보호 대책이 시급하다”며 “고압전선에 색깔을 입히거나 독수리가 앉지 못하도록 전선과 전봇대에 장치를 설치하는 등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독수리 월동지 인근의 고압 송전선로를 지중화하자는 말도 나온다.

권혁성 한전 파주지사 배전운영부장은 “5억원의 예산을 긴급 편성해 6∼10월 장단반도 4㎞ 구간의 전선 피복을 두껍게 씌우는 방식으로 감전사고 방지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책이 늦어지면서 다음 달 말까지인 독수리 월동기에 감전 및 정전 사고가 잇따를 것으로 우려된다.

파주=전익진 기자 ijj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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