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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식의 야구노트] 굿바이, 원조 빅리거…그대들 없었다면 류현진·강정호도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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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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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서재응, 최희섭, 박찬호.


메이저리그(MLB) 뉴욕 메츠 시절 서재응(39)은 활을 쏘듯 공을 던졌다. 두 팔을 크게 벌려 잠시 멈추는 모습이 마치 활을 겨누는 것 같았다. 한국 양궁처럼 ‘양궁 피칭’도 백발백중이었다.

박찬호 이어 최희섭·서재응
1세대 스타 줄줄이 은퇴 선언
언어장벽·인종차별 이겨낸 그들
후배들도 용기내 빅리그 러시

2002년 MLB에 데뷔한 서재응은 2003년 초까지 103명의 타자를 상대하는 동안 볼넷을 하나도 내주지 않았다. 1945년 기록 집계 후 서재응은 가장 오랫동안 볼넷을 허용하지 않은 MLB 루키로 이름을 올렸다. 아울러 ‘컨트롤 아티스트’라는 별명도 얻었다.

2003년 메츠 선발로서 9승12패 평균자책점 3.82를 기록한 서재응은 6년 동안 MLB에서 28승40패 평균자책점 4.60을 기록했다.

팔꿈치 수술을 받은 뒤 강속구를 잃어버렸지만, MLB에서 한 시즌도 10승을 거두진 못했지만 서재응은 미국에서 9년을 버텼다. 강속구 없이도 MLB 거인들과 싸울 수 있다는 걸 그가 보여줬다. 힘이 아닌 자신감으로도 공격적인 피칭이 가능하다는 걸 그가 증명했다.

2008년 고향팀 KIA로 돌아온 서재응은 국내에서 8년간 42승48패 평균자책점 4.30을 기록한 뒤 최근 은퇴를 선언했다. 지난해 9경기에서 1승에 그친 노장의 퇴장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도 “후회 없이 뛰었다”고 했다. 그러나 서재응이 빅리거로 활약하는 걸 보고 자란 세대에게는 그의 퇴장이 아쉽기만 하다.

최초의 한국인 MLB 타자인 최희섭(37)도 최근 현역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코치 연수를 떠났다. 키 1m96㎝의 거구인 그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초(超)아시아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2002년 시카고 컵스에서 데뷔한 그는 2003년 1루 수비를 하다 뇌진탕 부상을 당해 상승세가 꺾였다. MLB 네 시즌 동안 40홈런, 타율 0.240을 기록했지만 그는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최희섭은 “솔직히 실력이 모자랐다”고 말했다.

2007년 KIA 유니폼을 입은 최희섭은 2009년 30홈런, 타율 0.308를 기록하며 팀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에는 잦은 부상과 부진 탓에 응원보다 원망을 더 많이 들었다. 큰 덩치와 MLB 이력이 최희섭에 대한 기대를 부풀렸고, 거기에 미치지 못한 걸 그는 늘 미안해 했다.

최희섭은 선수로서의 미련을 내려놓고 박병호(30)가 입단한 미네소타 트윈스, 김현수(28)가 뛰게 될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을 예정이다.

박찬호(43)는 미국 애리조나 캠프를 순회 중이다. KIA·NC 등에서 후배들을 상대로 야구와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94년 한국인 최초의 빅리거가 된 그는 야구인뿐 아니라 전 국민의 큰 희망이자 빛나는 꿈이었다. MLB에서 17년 동안 활약하면서 아시아 투수 최다승(124승)을 거두는 모습을 보고 수많은 ‘박찬호 키즈’가 생겨났다.

불 같은 강속구와 불굴의 투혼으로 거인들과 싸웠던 박찬호는 2012년 고향팀 한화에서 류현진(29·LA 다저스)과 1년 동안 함께 뛰었다. 그는 “한화의 대장은 내가 아니라 류현진이다. 현진이가 MLB에 가면 나보다 잘할 것”이라고 용기를 줬다. 그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가 신화처럼 남아있다.

이들이 MLB에서 활약한 건 벌써 오래전 일이 됐다. 그들은 꿈만 같았던 MLB에 도전했고, 언어장벽·인종차별과 싸우며 눈물 젖은 햄버거를 씹었다. 1세대 빅리거가 주축이 된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한국은 미국·멕시코 등을 꺾고 4강에 올랐다. 이들을 보고 배운 후배들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2009년 WBC 준우승의 주역이 됐다.

1세대 빅리거들은 두려움 없이 MLB에 도전했고 성공과 실패를 거듭했다. 지금은 쉽게 보일지 몰라도 당시 이들의 퍼포먼스는 기적과도 같았다. 덕분에 후배들은 더 편하고 쉽게 달리고 있다. 추신수(34·텍사스 레인저스)·오승환(34·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강정호(29·피츠버그 파이리츠)·류현진·김현수·박병호 등 2세대 빅리거 모두가 그렇다.

2016년 후배들의 MLB 러시를 보면 선배들의 뜨거웠던 청춘이 다시 떠오른다. 1세대 빅맨(big man·뛰어난 선수)들은 사라지지만 그들이 좇았던 꿈은 오롯이 남았다. 굿바이 빅리거, 굿바이 빅맨.

김식 야구팀장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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