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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영세 세입자 보호 못하는 임대차보호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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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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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주 경제부문 기자

홍익대 입구 상권에서 10년간 수제 소품 가게를 운영하던 김모(38)씨는 4년 전 인근 연남동으로 가게를 옮겼다. 유명 화장품 업체가 상가 주인에게 월세를 30% 올려주겠다고 나서면서 사실상 쫓겨났다. 그런데 연남동에 새로 얻은 가게도 비워야 할 상황이다. 이번엔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주인에게 높은 임대료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임대료 폭탄을 맞고 홍대 상권에서 밀려난 특색 있는 카페·갤러리가 연남동에 몰리면서 이색 상권으로 부상하자 눈독을 들이는 대기업이 늘어난 탓이다. 요즘 서울 주요 상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다.

상가는 특성상 입지나 규모 등에 따른 차이가 크다. 같은 서울 중구라도 명동의 3.3㎡ 평균 임대료는 89만원이지만 충무로는 13만원에 불과하다. 그런데 현재 상가 관련법은 월세 2억5000만원을 내는 명동의 대형 화장품 가게도, 월세 50만원을 내는 충무로의 작은 인쇄업체도 모두 보호 대상이다.

정부가 영세 세입자를 보호하겠다고 내놓은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안도 마찬가지다. 임대료나 지역에 대한 기준 없이 세입자 모두를 보호한다. 그런데 정작 영세 세입자를 괴롭히는 주범은 상가 주인만이 아니다. 이른바 ‘부자 세입자’가 소상공인의 설 자리를 야금야금 뺏고 있다. 신사동 가로수길도, 압구정 로데오거리도 소상공인이 모여 특색 있는 상권을 형성했지만 결국 대기업의 높은 임대료 공세에 모두 밀려났다. 유일하게 환산보증금(보증금+월세X100)이라는 기준이 있지만 효력은 제한적이다.

주택시장을 보자. 지역에 따라, 집값에 따라 세금·전매제한 기간·대출기준 등이 제각각이다. 그런데 정작 주택보다 더 세밀해야 할 상가 관련법은 항상 ‘전국구’다. 시행된 지 9개월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영세 세입자 보호를 위해선 권리금뿐 아니라 삶의 터전을 유지할 수 있도록 더 세밀한 장치가 절실하다.

최현주 기자 chj8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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