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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클립] Special Knowledge<612> 감자, 세계를 바꾼 먹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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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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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재 기자

SF 소설 『마션』은 화성에 홀로 남겨 진 우주비행사 마크 와트니의 생존 분투기입니다. 식량이 모자란 상황에서도 그가 무사생환할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는 척박한 화성에서 직접 키운 감자 덕분이었습니다.

‘감자 홍보대사’ 앙투와네트, 감자꽃 달고 무도회 나왔다죠

왜 감자였을까요. 우주로 쉽게 가져갈 수 있고, 다른 작물에 비해 좁은 공간에서 재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자는 더 나아가 문명의 성쇠도 좌우한 작물이었습니다.

학명 Solanum tuberosum, 가지과의 다년생식물. 바로 ‘감자’다. 작물 가운데 가장 적응력이 뛰어나다. 해안가에서부터 고산지대까지,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에서부터 북극과 가까운 그린란드에서까지 감자가 자란다.

밀·옥수수·쌀·사탕수수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째로 많이 생산하는 작물이다. 생산성이 좋기 때문이다. 감자는 덩이줄기 식물이다. 덩이 모양의 줄기가 땅속에서 자란다. 식물의 줄기가 변형된 덩이는 영양소를 저장하는 공간이다.

밀과 쌀 같은 곡물은 알곡이 많이 열리면 줄기가 무게를 견디지 못해 쓰러진다. 그래서 성장에 한계가 있다. 감자는 그럴 우려가 없다. 2008년 레바논의 한 농부가 사람머리보다 큰 10㎏짜리 감자를 수확했을 정도다.

게다가 영양분이 풍부하다. 필수 영양소를 골고루 갖췄다. 같은 재배면적(0.4㏊)을 기준으로 감자가 다른 곡물보다 2~4배 더 높은 칼로리를 제공한다.

감자의 원산지는 남미 안데스 산맥의 고원지대다. 지금의 페루와 볼리비아 북부까지 걸쳐있는 지역이다. 감자는 기원전 3000~2000년 재배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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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3800m의 안데스 고원은 화산과 지진 활동이 활발하고 기후도 서늘해 농사짓기에 그리 적합하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문명이 탄생하기 쉽지 않은 환경이다.

그런데도 여기서 터를 잡은 잉카 문명은 이집트 문명 못잖은 거대 건축물을 지었다. 감자 덕분이다. 미국 시카고대 역사학과 윌리엄 맥닐 명예교수는 “감자가 제국을 이끌었다”고 주장했다. 그 말고도 많은 학자들이 감자가 바꾼 세계의 역사와 경제를 연구한다.

하지만 감자는 저장하기가 곤란하다. 기온이 조금만 따뜻하면 바로 싹이 튼다. 감자 싹에는 솔라닌이라는 독소가 있다. 먹으면 식중독에 걸린다. 또 곰팡이에 약해 여러 달 저장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안데스 농민들은 해법을 찾아냈다. 기온이 내려간 밤에 감자를 내놓아 얼려 추뇨( 냉동 건조 감자)로 만든 뒤 밀봉하는 방법이다. 몇 년 동안 영양손실 없이 보관할 수 있다. 서기 100년 무렵 추뇨가 보급되면서 안데스 지역에 문명이 탄생했다.

잉카 제국이 농민으로부터 세금을 걷어 노동자·관료·군대에 급료를 줄 수 있게 돼 전쟁을 벌이고, 도로를 닦고, 건물을 건축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감자가 대서양을 건너 유럽에 퍼지게 된 배경엔 스페인이 있다.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1532년 잉카 제국을 정복하면서다. 1545년 지금의 볼리비아 포토시에서 대규모 은광이 발견됐다. 여기서 캐낸 은은 스페인을 강대국을 만들었다.

또 엄청난 양의 은이 저 멀리 중국까지 유통돼 전 세계 상업과 교역을 촉진했다. 은광 노동자를 먹여 살린 것도 역시 감자였다.

스페인 선원이 처음 유럽에 감자를 가져간 것으로 추정된다. 대서양을 건너 남미로 가는 항해에서 식량을 다 먹었기 때문에 유럽으로 돌아오는 길엔 현지서 먹거리를 챙겨야 했다.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 어부들이 제일 먼저 감자에 관심을 가졌다.

비상식량을 쓰기 위해 곳곳에 감자를 심었는데 그 중 하나가 아일랜드다. 감자는 이탈리아~프랑스 알자스~독일 라인란트로 이어지는 ‘스페인로(Spanish Road)’를 따라 유럽 중심으로 전파됐다.

이 도로는 네덜란드 독립전쟁(1567~1609년) 때 스페인 군의 보급로였다. 네덜란드 해적들이 바닷길을 막자 스페인은 육로로 군량과 보급품을 보내야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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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의 1861년 작 ‘감자 심는 사람들’. 19세기 중반만 하더라도 감자는 농민층 사이에서 비싼 빵을 대신해 허기를 달래준 유일한 작물이었다.

17세기 유럽에선 전쟁이 잦았다. 농민들은 군대의 약탈과 몰수에서 살아남기 위해 감자를 길렀다. 군대가 마을로 오면 감자를 캐지 않은 채 피신하면 됐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운 작물인 감자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프랑스의 프랑슈 콩테와 부르군디 지방에선 나병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한동안 감자 재배가 금지됐다. 그러나 감자 말고 농민의 생존에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거부감은 점점 옅어졌다. 감자는 스페인로를 벗어나 저지대(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 프랑스, 독일, 영국 등으로 퍼졌다.

18세기 감자는 유럽 역사에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대량으로 재배돼 인구를 먹여 살리면서 고질적인 기아를 사라지게 한 것이다. 두 명의 공이 컸다.

프러시아는 1744년 대흉작으로 수많은 국민이 굶어 죽었다.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은 감자농사를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농민에게 감자씨를 공짜로 나눠주고 재배법을 알려줬다.

감자는 프러시아가 주변 강대국을 무찌르고 강대국에 오를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오스트리아·러시아·프랑스 등 프러시아의 적국도 프러시아의 감자농사를 재빨리 배웠다.

프랑스 군의관 앙투안 오귀스탱 파르망티에는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됐다. 포로생활 중 주로 감자를 먹었다고 한다. 귀국한 파르망티에는 감자보급에 힘썼다. 프랑스의 루이 16세가 즉위한 뒤 1775년 곡물가격 통제를 풀었다.

식료품 가격이 오르고,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파르망티에는 루이 16세에게 감자를 추천했다. 루이 16세는 감자를 알리기 위해 단춧구멍에 감자꽃을 꽂았다.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는 감자꽃 머리 장식을 하고 무도회에 나갔다. 파르망티에는 상류사회 인사를 감자만찬에 자주 초대했다.

당시 프랑스에 머물던 토머스 제퍼슨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미국의 두번 째 대통령이 된 뒤 백악관 식단에 ‘프랑스식으로 차린 감자요리’를 넣었다. 이게 요즘 패스트푸드에서 빠지지 않는 감자튀김 ‘프렌치 프라이(French fries)’다.

감자 때문에 웃고 운 나라가 아일랜드다. 영국은 1653년 아일랜드를 정복했다. 소작농과 머슴으로 전락한 아일랜드인들은 빵과 치즈를 살 돈이 부족했다. 그래서 1에이커(0.4㏊)의 감자밭과 젖소 한 마리로 생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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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는 감자와 우유로 한 식구가 근근이 살 수 있었다. 감자는 돼지사료로도 쓰였다. 아일랜드인들은 돼지를 팔아 생필품을 샀다. 한마디로 감자는 아일랜드인 생활의 핵심이었다.

1845년 여름의 일이었다. 감자마름병을 일으키는 감자역병균(Phytophthora infestans)이 유럽에 옮겨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병원균의 고향은 감자와 같은 페루다.

여름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처음 나타난 뒤 네덜란드·독일·덴마크·영국의 감자농사를 망쳤다. 그리고 그해 9월 13일 아일랜드에 상륙했다. 증상은 감자 잎이나 줄기에 짙은 색 반점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곤 곧 말라 죽었다.

감자마름병이 아일랜드에서 처음 발병한 뒤 두 달 만에 전체 감자밭의 70% 넘게 쑥대밭이 됐다. 병충해는 1847년까지 계속됐다. 그런데도 영국은 모른 척했다. 전체 인구의 3분의1이 굶어 죽었다. 200만 명이 이민을 떠났는데, 대부분 미국을 택했다. 이때 미국의 35대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의 조상도 미국행 배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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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0년 무렵 감자는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1815년 프랑스의 연간 감자 생산량이 2100만 헥토리터(1헥토리터=100l)였다. 1840년엔 1억1700만 헥토리터로 늘었다. 굽거나, 찌거나, 으깨서 먹는 등 간단한 조리법도 한몫했다.

독일의 엘베강 너머 동쪽 지역은 호밀농사를 많이 지었다. 호밀은 재배기간이 짧지만 병충해에 약했다. 맥각병이 걸린 호밀을 먹으면 발작·환각이 일어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렀다. 그런데 감자가 들어와 독일·폴란드·러시아 인구가 크게 늘었다.

맥닐 교수는 “감자가 없었다면 독일과 러시아는 강국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감자가 빵을 대체하진 못했다. 곡물은 운반과 보관이 쉽고, 값이 비싸 지주가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감자는 가난한 계층의 주식 자리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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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가 본격 보급된 1750년 이후 유럽에서 인구폭발이 일어났다. 다른 어떤 대륙보다 인구 성장률이 높았다. 북·남미 대륙만이 유럽에 버금갔다. 그리고 유럽 역사상 처음으로 기아가 사라졌다.

당시 이런 상황을 목격한 영국의 애덤 스미스는 1776년 『국부론』에서 “감자밭에서 생산한 식량은 밀밭에서보다 더 많다. 어떤 곡물도 감자보다 영양이 풍부하다거나 특히 건강에 적합하다는 증거를 제시하진 못할 것이다”고 썼다.

인구가 늘면서 많은 수가 도시로 가 공장 노동자가 됐다. 도시화가 활발해졌다. 그들은 간신히 입에 풀칠한 정도의 임금을 받으면서 기계를 돌려 산업혁명을 일으켰다. 일부는 육군과 해군에 입대해 유럽의 식민지 정복 전쟁에 동원됐다.

결국 서양은 동양을 꺾고 세계를 제패했다. 감자는 잉카 제국에 이어 또 한 번 제국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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