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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스페셜칼럼D

우리는 백남준을 여전히 잘 모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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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열의 백남준 10주기 추모 퍼포먼스 [사진 문소영]

지난 28일 오후 서울 삼청동길, 흰 턱수염의 노인이 길다란 줄에 바이올린을 묶어 길바닥 위로 끌고 가고 있었다. 그는 곧 갤러리로 들어서서 테이블 앞에 섰다. 양손으로 바이올린 목을 잡고 치켜 올리더니 그대로 테이블에 내리쳐 박살을 냈다. 백남준의 행위예술 ‘걸음을 위한 선(禪)’과 ‘바이올린 솔로’를 결합해 재현한 것이었다. 10년 전 세상을 떠난 거대한 예술가에 대한 또 다른 중요한 예술가 김창열의 추모의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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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바이올린 솔로(One for Violin Solo)’ 1962년 초연. 백남준이 가담한 플럭서스(Fluxus) 운동의 창시이며 리투아니아 출신 미국 예술가인 조지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의 사진.

“원래는 바이올린을 천천히 들어올려 3~5분 정도 들고 있다가 갑자기 내리치는 것인데, 연로한 김화백(87세)에겐 힘든 일이라 바로 내리치셨다”고 갤러리현대 관계자가 귀띔했다.

원래의 퍼포먼스가 궁금해졌다. 웹을 뒤졌는데 백남준의 1962년 독일 뒤셀도르프 초연은 사진만 찾을 수 있었다. 대신 최근에 외국인들이 재연한 비디오 여럿을 유튜브에서 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 단순한 행위예술은 재미있었다. 바이올린이 공중에 치켜 들려있는 동안 고조되는 긴장감이 웬만한 서스펜스 영화 뺨쳤다. 그리고 쾅! 바이올린은 현란한 선율을 뿜어내는 대신 이 소리 하나를 남기고 산산이 해체됐다. 예상된 최후인데도 그 완전한 파괴가 그토록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충격과 허무감은 강했다. 간결하게 강렬했다.

‘바이올린 솔로’는 여러 화두를 낳았다. 이용우 세계비엔날레협회장의 설명처럼 어떤 서구 평론가들은 서구의 소위 ‘고급예술’을 상징하는 바이올린을 때려부순 것에 주목하며 백남준을 서구중심 예술의 엘리트의식을 파괴하는 ‘동양에서 온 테러리스트’라 부르기도 했다. 또 다른 평론가들은 백남준이 존경한 존 케이지의 ‘불확정성과 우연의 음악’을 계승한 것으로 본다. 또는 ‘오동나무는 수많은 소리를 품었으나 거문고로 만들면 한 가지 소리밖에 내지 못한다’는 노장사상에 따라 바이올린을 무위(無爲)의 상태로 돌려놓은 것이라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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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이 존 케이지에 대한 오마주로 만든 비디오 조각 ‘존 케이지(John Cage)’(1990). [갤러리현대 제공]

그런데 이렇게 회자되고 고전의 반열에 오른 퍼포먼스를 정작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백남준이 바이올린을 부쉈다는 얘기만 종종 들었을 뿐이다. 그렇게 듣기만 할 때는 솔직히 그 ‘튀는 행위’에 대한 막연한 반감이 강했다. 그런데 비록 원본은 아니지만 막상 그 전모를 보니 달랐다 - 재미있고 강렬했다.

이에 대해 이용우 협회장은 그동안 백남준의 삶과 예술이 우리 한국인에게 상당히 불균형적으로 소개됐다고 한 적이 있다. 독일과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한 백남준이 한국에 알려진 시기가 80년대 중반이었던 까닭에, 그의 화려한 비디오조각에만 익숙할 뿐 그의 철학의 근원을 보여주는 60∼70년대의 행위예술 및 설치가 덜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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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설치된 백남준의 ‘다다익선’(1988) [중앙일보]

그래서 생긴 오해의 결과가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를 마치 유형문화재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지난해 이맘때,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설치된 ‘다다익선’의 모니터 노후화에 대한 한 방송사 기사가 화제가 되었다. 교체할 브라운관 TV 모니터가 단종되어 더 이상 구할 수 없을 때 LCD 등 새 디스플레이로 교체할 수 있는가에 대한 기사였다.

그때 포털 댓글판에는 “박물관에 깨진 도자기를 새것으로 바꾸자는 소리나 마찬가지” “모나리자를 똑같이 그려 복원한다고 해도 그게 모나리자는 아니지”라는 댓글들이 많은 호응을 받았다.

즉 많은 대중은 백남준의 작품을 ‘모나리자’처럼 창작자의 붓 터치라는 고유의 물질성이 훼손되면 작품의 가치를 잃는 미술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미술의 획을 그은 마르셸 뒤샹의 작품 ‘샘’이 그 변기 자체라고 착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뒤샹의 작품 ‘샘’은 사실 그 ‘변기’가 아니라 대량생산된 변기 중 하나를 골라 서명을 해서 미술관에 가져온 일련의 ‘행위’이며 그것에 담긴 질문, ‘미술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의 범위는 무엇인가’이다. 마찬가지로 백남준의 작품은 비디오 모니터들이 아니라 그들을 통한 백남준의 미디어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질문과 연구이다.

바로 그 때문에 백남준을 오래 도와온 테크니션 이정성이나 공동작업을 한 아티스트 폴 개린 등은 백남준 작품의 단종된 모니터를 첨단 디스플레이로 교체하는 것에 긍정적이다. 물론 모니터를 교체한다는 것은 TV자체를 바꾼다는 것이 아니라 브라운관TV의 외형골격은 두고 화면 나오는 부분을 교체한다는 것이다.

백남준 작품의 특성인 비물질성은 ‘모나리자’ 같은 고전미술과 포스트모던 미술의 주요 차별점이며, 대중이 동시대미술을 ‘알아먹지 못할 요상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 주요 원인이다. ‘작가의 특수한 기술이 발휘된 아름다운 것’이라는 전통적 정의로 미술을 보면, 대부분의 동시대미술은 그냥 황당하다.

그러나 ‘시각적 인문학’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한결 이해하기 쉽다. 마셜 맥루언이 새로운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생각을 글로 썼다면, 백남준은 그걸 퍼포먼스와 영상과 비디오 설치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백남준은 비주얼 인문학자였다.

그래서 백남준은 쉽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백남준은 결코 대중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그가 다룬 근본적인 질문들 - 급변하는 매체의 시대에 사람들은 어떻게 소통할 것이며 예술은 어떤 모습일 것인가 - 는 모바일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갈수록 중요해지는 질문이다. 백남준은 화폭에 그려져 엘리트 컬렉터들이 비싼 값에 거래하는 미술 대신 TV 영상에 떠서 전세계 사람들이 손쉽게 동시다발적으로 보며 또 작품과 쌍방교류하는 그런 미술을 원했고 그 원형을 제시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미술가” “비디오아트의 아버지”라는 말에 함몰된 채 그의 기념비적 비디오 조각들을 미술관에서 신주단지나 민족문화재처럼 대할 뿐, 그에 대해 아직 잘 모르는 편이다.

우리가 잘 모르는 상태로 어떻게 세계미술사에서 그 업적에 비해 저평가된 그의 위상을 끌어올릴 수 있을까?

올해는 백남준 10주기다. 미술관의 여러 행사들도 좋지만, 나는 그를 제대로 알게 하기 위해서는 예능 방송에서 그의 퍼포먼스를 재연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농담이 아니다. 우리는 자꾸 백남준을 ‘죽은 위대한 미술가’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백남준의 근원적인 특성은 살아있는 동시대성이다. 백남준 퍼포먼스를 변형해서 릴레이로 SNS에서 하는 것도 그를 기리는 멋진 방법이 될 것이다.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symo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