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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로 흐르던 유럽·동양 ‘도킹’ 정화 함대가 오가며 해적소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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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호 14면

믈라카 시내의 관광용 회전 전망대에 오르면 믈라카해협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평선 너머에 수마트라섬이 있지만 거리가 멀어 보이지 않는다. 믈라카해협은 인도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뱃길로 아직도 해적이 출몰한다. 최정동 기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는 손쉽게 해협신문(Straits Times)을 구할 수 있다. 1845년부터 간행된 신문이다. 우리에겐 ‘해협’이란 단어가 덜 익숙하며, ‘해협문명’ 따위는 더더욱 잘 모른다. 엄밀히 따지자면 해협을 둘러싼 정치·사회·경제적 함의는 우리에게도 존재한다. 대한해협이 그것이다. 그러나 해협을 둘러싼 문명의 맥락보다는 대체로 현해탄 정도로 축소 인식될 뿐이다. 이번에는 바로 그러한 해협을 둘러싼 문명사의 궤적을 찾아 나섰다.


해양문명사에서 중요한 해협은 두 곳이다. 하나는 아프리카 북서부와 유럽 서남부 꼭짓점을 연결하는 지브롤터해협. 그리스 시대부터 ‘헤라클레스의 기둥’으로 불리며 지중해와 대서양을 연결해온 전략 요충지다. 동양권에서는 단연 믈라카해협이다. 인도양과 태평양을 연결시켜, 마침내 유럽의 동진과 동양의 서진이 교류·충돌·융합한 해협이기 때문이다.


온갖 종교 번갈아 번성한 종교박람회장지난해 12월 20일 말레이시아 믈라카에 도착하자마자 전망대에 올랐다. 좁은 해협으로 컨테이너와 유조선 등 큰 배들이 시내버스처럼 줄지어 지나간다. 지난 1000년 이상 뱃길이 끊이질 않은 길목엔 해적도 여전하다. 소말리아 인근 해역과 더불어 아직도 해적이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관문이다.


믈라카 시내에 들어서면 유네스코문화유산 간판부터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해협의 해양문명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면 믈라카 시내만으로는 부족하다. 말레이반도 북단에 훗날 영국인이 본격적 거점으로 만들어낸 인도양 길목 페낭, 남단의 태평양 관문 싱가포르, 무엇보다 해협 건너편 수마트라의 메단과 팔렘방, 수마트라 북단의 반다아체를 두루 고려해야 한다. 이들 도시는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해양문명 자체가 항구도시의 네트워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해협의 본질은 ‘통로’이며, 통로의 본질은 ‘흐름’이며, 흐름의 모든 과정은 ‘융합’일 수밖에 없다. 해협의 이러한 전 과정을 종교만큼 잘 말해주는 문명 요소도 없다. 믈라카해협 일대는 온갖 종교가 정착·육성·실험을 거듭한 ‘종교박람회장’이다.


본디 7~11세기에 걸쳐 중국과 인도 사이의 동남아 해상무역을 주름잡던 스리위자야왕국(683~1025)이 믈라카해협을 장악하고 있었다. 왕국의 수도는 해협 건너편 수마트라 팔렘방이었다. 믈라카해협과 순다해협을 포함한 수마트라, 칼리만탄, 서부 자바 등이 모두 관할 구역이었다. 중국과 인도로 가는 정기적인 항로가 개척되었고, 왕국은 해상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의정(義淨·635~713)이 서역으로 가는 길에 팔렘방에 당도했을 때, 불경 번역 등 국가적 불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스리위자야는 바다로 전래된 남방불교의 완연한 불교 왕국이었기에 중국명으로 삼불제(三佛齊)였다. 스리위자야를 이어서 해상권을 장악한 마자빠힛왕조(13~16세기)는 불교와 힌두교를 믿었다. 향료 시장이 커지면서 차츰차츰 믈라카가 주목을 받자 마자빠힛은 몰락하게 된다.


이슬람이 인도양을 가로질러 수마트라와 말레이반도에 당도하면서 사태가 일변했다. 14세기 무렵 무슬림이 주도하는 믈라카왕국이 성립된다. 동남아 해상주도권은 믈라카로 넘어갔다. 믈라카의 무역망은 중국·인도네시아·인도는 물론이고 동아프리카·페르시아·지중해·일본까지 닿고 있었다. 식량과 주석, 금과 후추 등 온갖 박래품이 동남아 최초의 중개무역 도시인 믈라카를 통해 동서를 이어나갔다.


믈라카왕국 성립 당시의 동남아 패권은 시암(태국)이 쥐고 있었다. 시암은 불교 왕국으로 신흥 믈라카와 동남아 해상무역 패권을 놓고 경쟁했다. 믈라카왕국은 정략적으로 중국을 끌어들이고, 반대로 인도양 진출을 꾀하는 중국은 왕국과 친연 관계를 맺는 ‘윈윈 게임’이었다.


최고의 친연 관계는 결혼을 통해 맺어진다. 믈라카에는 흥미로운 우물 이야기가 전해온다. 왕국으로 시집 온 명나라 공주가 사용하던 우물이다. 공주는 무려 500여 명의 시종을 대동했다. 당연히 엄청난 후손이 퍼졌다. 중국인이 말레이족과 결혼하여 바바뇨냐(baba nyonya)라는 인종을 탄생시켰다. 남자는 바바, 여자는 뇨냐다. 믈라카 바바뇨냐박물관에 가보면 믈라카의 다인종 징표가 한눈에 다가온다. 2013년 한국 국립중앙박물관과 싱가포르 아시아문명박물관이 ‘싱가포르의 혼합문화, 페라나칸’ 전시를 열었다. 이는 말레이반도 전체가 융·복합적 혼합의 상징적 매개지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1 성바울 교회 앞 하비에르상. 2 믈라카를 지배했던 나라들. 3 성바울 교회.

믈라카왕국, 정략적으로 중국 끌어들여취재팀은 중국인이 청운의 꿈을 안고 이주해온 뜻을 담은 칭윈팅(靑雲亭·1673년 건립) 사원을 찾았다. 대항해가 정화(鄭和·1371~1433)를 모셔놓은 곳이다. 믈라카 곳곳에는 정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믈라카해협의 운명은 애당초 믈라카와 중국인이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정화 함대는 믈라카를 통해 일곱 차례 대원정에 나섰다. 해협을 오가면서 무력시위를 벌여 믈라카왕국이 국제무역 주도권을 잡는 데 도움을 준 것이다. 중국 무역상인은 수마트라의 후추를 사들여 부를 축적했고, 함대는 해협의 해적을 청소해 항로의 안전을 확보했다.


쿠알라룸푸르 시내 곳곳에서 장사에 종사하는 중국인을 만난다면, 믈라카에서도 마찬가지다. 믈라카 역사에서 차이나타운과 중국계 말레이인을 빼놓는다면 역사 서술 자체가 불가능하다. 서구 열강의 침략에 따른 백인의 동서교류 주도권 장악이라는 관점에서만 볼 게 아니다. 정작 동남아 해상교역의 버팀목은 중국이었기 때문이다. 중국 무역선이 싣고 온 비단·도자기·금 등은 인도양을 거쳐 페르시아만, 지중해까지 교역되었다.


믈라카역사민족박물관을 찾아갔다. 네덜란드광장에 있어 언제나 관광객이 들끓는다.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일본 국기와 인물 모형이 순서대로 서 있다.(사진 2) 믈라카를 식민지배했거나 일시 점령했던 나라다. 가장 먼저 당도한 나라는 역시 포르투갈이다. 바스코 다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1498년 인도 캘리컷에 도착한 지 불과 20여 년 뒤인 1509년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가 함대를 이끌고 믈라카를 점령한다.


관광코스에서 빠질 수 없는 산티아고 요새의 포르모사 정문은 그날의 역사를 웅변한다. 포르투갈의 강력한 흔적은 핏줄로도 이어온다. 포르투갈 혼혈인은 말레이시아에 1만여 명이 살고 그중 2600여 명은 믈라카에 있다. ‘포르투갈 유라시아인’은 ‘메단 포르투기스’라는 집단촌을 꾸리고 포르투갈 방언 크리스탕을 쓴다. 이들의 주 종교는 가톨릭이다. 믈라카에는 어쩌면 포르투갈인보다 훨씬 전에 당도했을 인도 상인과 말레이 여인들이 결합하여 탄생한 후손들의 캄풍치티공동체도 존재한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는 1641년 믈라카를 점령하여 150여 년을 지배했다. 오늘날 관광객 집결처이자 박물관으로 쓰이는 스타트휘스는 동남아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네덜란드 건축물이다. 박물관 뒷문으로 올라가면 산티아고 요새다. 애초에 포르투갈이 세웠다가 나중에 네덜란드가 접수한 성바울 교회(사진 3)가 잔해를 남긴다. 지붕은 무너지고 벽만 남았으나 그 시절을 살다간 유럽인의 장중한 묘비명을 남겼다. 비석 하나하나가 식민 개척에 나섰던 관리나 상인, 성직자의 기록이다.


바닷길 통한 문명교류의 선 확인성바울 교회가 서 있는 언덕 위로 올라가 봤다. 교회 앞에 세워진 하비에르(1506~1552·사진 1) 동상은 어쩌면 믈라카의 비밀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비에르는 이냐시오 로욜라와 함께 예수회를 만든 독특한 인물. 하비에르는 리스본을 떠나 인도 남부 진주 해변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다 정향(丁香)과 육두구(肉荳) 같은 향료 본산지 몰루카 암본에서 선교를 시작한다. 1545년 8월에 믈라카로 되돌아오는데 당시 매우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다. 일본인을 만나서 데리고 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일본인은 어떻게 머나먼 믈라카까지 오게 되었을까. 신흥무역상의 한 사람으로 살인죄를 짓고 도피처를 찾던 야스지로(安次郞)는 포르투갈 상인을 만나 무역선을 타고 믈라카까지 왔다. 포르투갈 무역선이 가져오는 이국적 박래품은 일본인들을 사로잡았다. 상인들은 동서 교류의 첨병 역할을 하며 일본과 믈라카를 오갔다. 믈라카는 인도 고아로 연결되었고, 다시 리스본으로 확장돼 바닷길을 통한 문명교류의 선이 강력하게 마련되었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천후궁. 중국계 말레이인에게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야스지로, 선교사 하비에르와 일본행야스지로는 하비에르를 만나 감화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한다. 그는 포르투갈어를 배웠으며 마침내 일본 선교의 선봉이 되어 1549년 4월 25일 하비에르와 함께 가고시마로 떠난다. 기독교 동방전래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믈라카에서 시작된 것이다. 당나라 때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중국 수도 장안에 전해졌지만 일본 열도의 유럽 선교사 출현은 하비에르가 최초이기 때문이다.


하비에르가 일본에 머문 기간은 고작 27개월. 그는 중국 선교에 몰두하다 중국 땅에서 사망하고 만다. 시신은 자신이 늘 동방선교의 출항지로 삼았던 믈라카로 운구된다. 오늘날 하비에르가 믈라카에서 기적을 행하던 언덕 위에 동상이 세워졌고, 시내에는 하비에르 성당이 전해온다. ‘포르투갈-인도-말레이시아-일본-중국’으로 이어졌던 기나긴 바닷길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쿠알라룸푸르로 돌아가기 전, 운하변의 줄지어 서 있는 고건축군 사이를 거닐었다. 제국의 영화를 보장하던 중개무역의 실핏줄인 그곳.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 그렇게 순서를 바꾸어가면서 제국은 강렬한 흔적을 곳곳에 남겼다. 일본도 제2차 세계대전 때 잠시 믈라카와 싱가포르를 점령하긴 했으나 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믈라카는 이처럼 동서 문명이 부딪히던 ‘문명의 용광로’였다. 16세기 이래로 서구열강이 지배하기는 했으나 말레이·중국·인도·아랍이 바탕을 이루었다. 힌두교와 이슬람, 개신교와 가톨릭, 불교와 도교 그리고 유교가 교차한다. 차이나타운과 리틀인디아, 힌두교 사원과 불교 사원, 대항해가 정화와 유럽의 식민총독, 말레이와 다양한 혼혈도 1000년 도시 믈라카의 오랜 융합적 결과물이다. 융합은 쿠알라룸푸르와 싱가포르, 페낭으로도 확산했다.


그러나 오늘의 말레이시아는 ‘국민국가’로서 말레이의 정체성을 강렬하게 묻고 있는 중이다. 몰려드는 믈라카 관광객의 홍수 속에서 런던 리드대의 빅토어 킹 석좌교수는 동남아 인류학·사회학 전문가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서의 믈라카인가, 말레이시아로서의 믈라카인가.”


믈라카의 다양한 식민지와 외국풍 건축군 틈새에서 옛 술탄의 전통 건축물이 비집고 들어서 있는 풍경은 말레이족의 정체성에 관한 강력한 자기질문이기도 하다.


‘문명의 용광로’가 앞으로도 더 이상 가능할 것인가, 그러한 질문을 믈라카해협에서 진지하게 던져본다.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asiabad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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