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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오징어·계란·김밥~” 손수레는 맛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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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 안에서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서울역에서 파는 김치볶음밥ㆍ주먹밥ㆍ떡볶이ㆍ샌드위치ㆍ튀김ㆍ볶음국수ㆍ불고기덮밥 등 먹거리와 손수레에서 파는 삶은 계란, 오징어 같은 간식거리로 여느 만찬이 부럽지 않은 열차 안 밥상을 연출했다.

어릴 적 기차를 타면 항상 설렜다. 잔뜩 신이나 촐싹거리면 아버지는 “조용히 있어야 이따 먹을 거 사준다”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곧장 자세를 고쳐 앉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얌전해졌다. 열차 판매원의 손수레가 언제 등장할까 문만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마음속으로는 먹을 것을 고르고 또 골랐다. 드디어 손수레가 눈앞에 멈춰 섰고, 삶은 달걀과 ‘빠다코코낫’ 그리고 ‘바나나맛우유’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됐다, 이번 여행은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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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대전역에 있던 가락국수 매점 [코레일 유통 제공]

아직도 기차를 떠올리면 먹을거리 잔뜩 실은 손수레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삶은 달걀이 희한하게도 기차만 타면 피자보다 더 맛있었다. 아버지 세대는 승강장에서 열차가 떠날까 발을 동동 구르며 후루룩 마시다시피 했던 가락국수를 추억한다. 열차 안에는 항상 꿉꿉한 마른오징어 냄새가 가득했고, “딸깍” 맥주 캔 따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우리는 기차 안에서 언제부터 먹을 것을 팔았을까. 1905년 4월 2일자 ‘황성신문’에 ‘초량 경성간 열차에 있는 식당칸 주방에서 일본식·서양식·음료·과자·과일류를 팔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경부선 철도가 1905년 1월 1일 개통했으니 열차가 등장하고 거의 처음부터 먹거리를 팔았다는 얘기다. 그 시절에는 기차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려면 20시간 가까이 걸렸다. 기차 안에서 최소한 두 끼는 해결해야 했다.

80년대 이전까지 식당칸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특급열차 중에서도 몇몇 열차에만 식당칸이 달렸다. 63년부터 84년까지 서울∼여수를 오간 증산호와 54∼77년 서울∼부산을 달린 통일호(이 시절의 통일호는 이후의 통일호와 달리 등급이 높았다. 통일호 열차는 2004년 사라졌다)가 대표적이다. 식당칸에서는 즉석 요리한 양식 메뉴나 초밥 같은 일식 메뉴를 팔았다.

지금은 어떤 열차에도 식당칸이 없다. 일반열차(무궁화호·새마을호)에 있던 식당칸은 카페칸으로 대체됐고, 고속열차(KTX)에는 스낵바가 들어섰다. 열차 한 량을 개조해 꾸민 카페칸에는 간식을 파는 스낵바, 안마의자, 노래방 기계 등 편의시설이 모여 있다. 현재 운행하는 일반열차의 절반 정도에만 카페칸이 달려 있다. KTX의 스낵바는 카페칸처럼 열차 한 량 전부를 이용하지 않고, 여객칸의 일부를 개조해 만들었다. 그마저도 2010년 도입한 KTX-산천에만 있다.

사실 기차여행의 추억은 객차 통로를 오가던 손수레가 더 어려 있다. 그러나 이제 일반열차에는 더 이상 손수레가 다니지 않는다. 2009년 일반열차의 손수레 영업이 종료됐다. 현재는 KTX에서만 운영한다.

기차에 손수레가 처음 등장한 것은 69년이다. 이전에는 바구니가 대신했다. 대나무로 짠 바구니에 삶은 달걀이나 귤·김밥 등을 담아 팔았다. 기차 안 음식의 시대별 인기 품목도 흥미롭다. 코레일유통에 따르면 60년대 이전의 인기상품은 백반도시락과 담배였다. 그 시절에는 좌석에 앉아서 자유롭게 담배를 피웠다. 김밥도 잘 팔렸다. 열차 안에서 식품을 독점 판매했던 강생회(코레일유통의 전신)가 전국 각지(서울·대전·영주·부산·강릉)에 김밥공장을 지어 물건을 공급했다.

60년대는 오징어·땅콩·소주와 삶은 달걀이, 70년대는 호두과자가 인기 품목이었다. 기차를 타면 꼭 호두과자 선물세트를 집에 사가던 시절이었다. 80년대에 들어서는 카스테라와 전기구이 오징어, 캔 맥주가 잘 팔렸고 90년대에는 믹스 커피와 바나나맛우유가 인기 상품으로 떠올랐다. 2000년대에는 안동 간고등어, 돌산 갓김치 같은 지역 특산품도 팔았다.

코레일관광개발에 따르면 지난해 열차 내에서 커피·도시락·바나나맛우유 순서로 많이 팔렸단다. 커피(아메리카노·카페라떼·카페모카)와 도시락은 종류가 다양하니까, 단일 품목으로는 바나나맛우유의 인기가 가장 높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아쉽게도 삶은 달걀은 20위권 내에 없었다. 위생 문제 때문에 겨울에만 판매한단다.

기차 안 음식의 최장수 상품은 도시락이다. 도시락은 한반도에 기차가 달리고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 현재 일반열차와 KTX 안에서 코레일관광개발이 ‘레일락’이라는 이름의 도시락을 독점 판매하고 있다. 요즘에는 기차 역사(驛舍)에도 먹을게 널려 있다. 서울역 맞이방(대합실)에서 승강장까지 이어진 선상통로에는 한식·일식·분식 등 도시락 메뉴를 파는 점포 8곳이 줄이어 있다. 부산역은 부산 별미 집합소다. 씨앗호떡·유부주머니 등 길거리 음식도 역사 안에 들어왔다. 대전역에는 일본 초밥과 비슷한 한식 미니도시락이 있다. ‘스테이션 청춘 셰프’로 선정된 ‘쁘띠박스’에서 판다. 스테이션 청춘 셰프는 코레일이 지난해 청년(18∼35세)을 대상으로 진행한 기차역 먹거리 발굴 사업이다. 공모전을 통해 모두 5팀이 뽑혔고, 그 중 쁘띠박스팀이 첫 번째로 대전역에 가게를 열어 음식을 팔고 있다.

열흘 뒤면 설이다. 모두 고향으로 향할 참이다. 기차는 애정을, 그리움을, 걱정을, 셀럼을 안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달려갈 테다.

이 설을 앞두고 기차 먹거리를 소개한다. 고향으로 가는 길의 설렘을 더해주고 돌아오는 길 헛헛함을 달래줄 뜨끈한 밥 한 끼를 내놓는다. 이번 설에 기차를 타시면 역을 잘 살펴보시라. 온갖 반찬으로 가득한 이색 도시락과 명성 자자한 지역 별미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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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홍지연 기자 jhong@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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