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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조작한 사람은 훈장 받고 국립묘지 가고...이게 제대로 된 나라입니까?”

중앙일보

입력

 #간첩이 된 아버지의 이야기

  낮인지 밤인지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이문동을 거쳐 남산(대공분실)으로 끌려왔다는 것 외에는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여러 날 째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잠깐 혼절했다 깨고 혼절했다 깨는 것이 전부였다.

잠을 안 재우는 것은 기본이고 내가 부인하거나 제대로 조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각목으로 온 몸을 구타했다. 또 수사관 두 세 명이 얼굴을 물속에 쳐 넣거나 아니면 얼굴에 수건을 덮고 물을 붓는 고문을 했다.

제일 견디기 힘든 것은 발가벗겨 놓고 고무호스로 때리는 것과 침대에 눕혀 놓고 수건을 코와 입에 대고 물을 붓는 물고문이었다. 고문을 한 다음에는 의사가 와서 맥박을 재고 약을 바르는 등 죽지 않게 조치를 했다.”

<울릉도간첩단사건 피해자 故최규식씨 증언에서 발췌>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 당시 두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고문의 기억을 하나 둘 떠올리는 것 자체가 내겐 또 다른 고문과도 같았다.  

 당시 그들(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은 끊임없이 내게 질문을 했지만 굳이 내 대답을 들으려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은 서두르지도 않고 그들이 해야 하는 일상적인 일들을 다 하며 고문을 했는데 사람이 아니라 기계 같다는 생각도 언뜻 들었다.

 남산 대공분실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지 40년이나 지났지만 당시 조사실에서 한 수사관의 나즈막한 말이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 속에 남아있다.

너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 알지? 최 교수도 여기서 죽어 나갔어. 왜 죽어 나갔는지 알지? 너 같은 놈은 여기서 죽으면 그걸로 끝이야.”

너무 오래돼 날짜까지는 기억할 수는 없다. 1974년 2월 어느날이었을게다. 당시 공화당 수석부위원장으로 일하며 이병옥 의원(공화당)의 전라북도 줄포 순회유세 자리에 참석했다. 그런데 두 명의 낯선 남자에게 붙들려 중앙정보부 전주분실로 끌려갔다.

며칠 후 서울 남산 대공분실에서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됐고 나는 어느새 북한의 지령을 받은 간첩이 돼 있었다. 일본 도쿄대 유학생시절이던 68년 당시 지인들에게 이끌려 낚시배를 탔던 것이 화근이었다. 수상한 낌새를 느꼈지만 이미 배는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청진항이었다.

 중간에 북한에 가는 모양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내리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한 번 가보고 싶은 호기심도 있었다. 청진에서 딱 일주일 머물렀다 다시 돌아온 것이 전부였지만 이런 나의 과거 행적은 족쇄가 됐다. 중정에 끌려가 조사를 받은 지 불과 한달 정도 지난 74년 3월 중순. 중앙정보부는 ‘울릉도 거점 간첩단사건’을 언론에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울릉도와 전북지역을 거점으로 학생, 지식인, 정치인, 종교인, 노동자, 농민, 군 간부 등 47명이 북한에 포섭돼 암약하며 10년 동안 간첩활동을 해 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 번도 보지도 또 잘 알지도 못했던 울릉도 출신 사람들과 함께 묶여 대규모 간첩단 사건의 일원이 돼 있었다. 이 사건으로 3명이 사형당하고 나머지는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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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간첩단 사건.

나 역시 1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가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내가 세상 빛을 다시 보게 된 것은 감옥생활 17년 째인 91년 2월이었다. 가석방 직후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출소 9개월 전에 돌아가신 부친의 산소였다. 부친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한 죄스러움 때문에 산소에 움악을 치고 석달 시묘살이를 했다.

 17년 만에 나온 세상은 내가 전에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돈을 오랫동안 쓰지 않아 지폐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속도를 예측하기 힘들어 건널목을 건널 때 차의 속도와 발걸음의 속도를 계산하지 못해 몇 번이나 사고를 당할 뻔 하기도 했다.

 세상에 겨우 적응하며 노년을 보내던 내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이 찾아왔다. 2010년 정부 과거사위원회가 이 사건을 조사해 간첩조작사건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위원회의 재심 권고 결정을 근거로 또다시 법정 싸움이 시작될게다. 하지만 간첩혐의를 벗기 위해 내게 허락된 시간은 많지 않았다. 2012년 7월, 암 투병 중이던 나는 재심개시 결정 소식을 전해들은 직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불과 1시간이나 지났을까. 나는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두고 이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아들의 이야기
 아버지는 평생 간첩이라는 굴레를 쓰고 힘겹게 살다 가셨다. 재심개시 결정을 알려드리자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 혼수상태로 의식이 없는 줄 알았는데...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아버지 면회를 간 기억이 난다. 너무 어려 그때는 아버지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 무슨 얘기를 제대로 나눌 수 없었다. 다만 억울하시다는 말씀은 종종 있으셨는데 어린 아들에게 그 세세한 이야기를 길게 하실 순 없으셨을게다.

문득 당시 이 사건을 조작한 이들은 현재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재심무죄가 난 이 사건에 대해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최근 이 사건을 취재하고 있는 언론사 취재팀에게 당시 사건을 수사한 중정수사관 얘기를 듣게됐다. 담당수사관과 그 지휘라인에 있던 인사들은 국가 안보에 기여한 공으로 정부로부터 보국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 가족의 삶을 온통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잘했다고 훈장까지 받았다니…. 이게 국가라고 할 수 있는건지. 가슴이 먹먹해온다. 

 그놈들 마음대로 하라고 그래요.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같은 것은) 하나도 없어요. 미안한 것 없어요. 자기네들이 죄 지어서 그만한 대가를 받은거지. 증거가 있으니까 그 당시에도 법관들이 그렇게(유죄판결을) 한거지. 훈장은 아무나 받나? 훈장은 그렇게 쉽게 받는게 아니에요.”

당시 중정수사관이 언론사 기자에게 했다는 이 말을 전해듣고 내 귀를 의심했다. 세월이 흐르고 진실이 드러났지만 하나도 바뀌지 않았구나. 그에게 나의 아버지는 여전히 간첩일 뿐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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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내용은 울릉도간첩단 사건을 조사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결정내용과 이 사건을 다룬 책 <울릉도 1974> 그리고 피해자 최규식씨의 가족을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스토리텔링형식의 기사로 재구성한 것이다. 사건의 피해자이자 간첩혐의로 17년을 복역한 최규식씨는 2012년 7월1일 법원의 재심개시 결정을 전해들은 직후 사망했다. 

이 내용은 금요일(29일)오후 9시 40분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대한민국 훈장의 민낯>편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67년만에 공개되는 대한민국 훈장 68만여건의 비밀

고성표기자 muzes@jt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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