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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컬쳐디자이너 강주혜의 아름답거나 미친 긍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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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터 강주혜, 필명이 ‘미긍 주혜’라 했다.
‘미긍(美肯)’은 ‘아름다운 긍정’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녀의 필명을 들었을 때, 결코 긍정할 수 없는 일에 억지로라도 긍정을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인가보다 했다.

강작가는 중앙일보 연중기획, ‘매력시민 세상을 바꾸는 컬쳐디자이너’들 중 한 명이었다.

사실 그녀를 만나기 전, ‘컬쳐디자이너’란 용어조차도 친숙하지는 않았다.

그녀를 취재하면서 ‘컬쳐디자이너’란 의미를 알게 되었다.

이른바 자신의 재능과 열정을 바탕으로 묵묵히 우리 사회를 바꿔 가는 창의적 시민을 일컫는 용어였다.

비록 덜 알려져 있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서 문화적 상상력을 실현하고 있는 숨은 영웅들을 발굴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널리 알리자는 취지의 기획이었다.

강주혜작가를 취재를 하려고 방문한 게 지난해 12월이다.
그녀는 집에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맞아 주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집으로 오게 해서 죄송하다고 했다.

“신문사로 인터뷰를 하러 가는 게 마땅한데, 도저히 혼자 보내기가 걱정되어서요. 그곳에 가려면 계단도 많을테고…….”

다 큰 처자가 혼자 다니기 어려우며, 계단이 염려된다는 게 좀 의아했다.
오래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강작가가 왔다. 걸음걸이가 남달랐다.
한쪽 다리의 무릎을 굽히지 않고 편 상태로 발을 끄는 듯했다.

강작가가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이렇게 이쁜 사람 처음 보죠?”

당황스러운 첫인사였다.

뭐라 답을 못하고 어정쩡한 미소로 서있는데 그녀가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맛있는 빵을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 빵을 사왔어요. 빵 좀 드시고 인터뷰를 하시죠.”

그 빵! 뭉클했다.

그런데 대화를 하는 그녀의 시선이 특이했다.
마주했지만 시선이 정면을 벗어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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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가 시작되었다.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2003년 첫 번째 교통사고가 났다.
당시 25살이었다.
음주차량에 치여 8m가량 나가떨어졌다.

한 달간 뇌사상태였다.
뇌 손상으로 시각장애, 오른손 마비가 왔다.
게다가 아이의 지능과 감성으로 돌아가 있었다.
다리도 불편했다.
두 개로 기울어 보이는 계단을 내려가다 구르기 일쑤였다.

2007년 재활차원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비된 오른손, 똑바로 보이지 않는 눈이지만 그래도 그릴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계속 마비가 진행되는 오른팔의 감각을 살리기 위해 하루 100장씩 드로잉을 했다.
2010년 일반인들과 함께 일러스트학원을 다닐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2011년 두 번째 교통사고가 났다.
다리는 탈골이 되었고 왼손마저 기브스를 해야 했다.
11개월간 그림을 못 그리게 되었고 오른손 마비가 다시 진행되었다.
좌절했고 많이 울었다.

지금도 매일 매일 오른손 마비가 오고 있다.
더 이상 마비가 되지 않게 하려면 열 시간 이내에 펜을 들어야 한다.
시각 때문에 그림이 5도 정도 기울어져 있는 게 고민이었다.
선생님에게 자문을 구했다.
‘기울어짐이 너만의 특징’이라고 답하기에 그날부터 그만의 독특한 특징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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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또박또박 들려준 그녀의 이야기 충격이었다.
그런데 참 담담하게도 말했다.
강작가는 2013년 자신의 그림을 모아 첫 전시회를 열었고, 두 권의 일러스트 책을 출간했다.

매주 그녀의 블로그에 ‘미긍 세상’이란 그림과 글을 연재하고 있다.
강연으로 아름다운 긍정을 전파하기도 한다.

‘두 개의 달’이라는 작품을 그녀가 보여줬다.
그녀에게 보이는 그대로 그린 게다.
그녀에겐 달이 두 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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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달’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두 개의 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어.
마비된 오른손으로 단추를 채울 수 있게 해 달라고.
이젠 그 손으로 긍정의 그림을 그리고 있지.
(후략)’

그녀에게 두 개로 보이는 달,
꿈을 이루어 줄 수 있는 ‘소원의 달’이 두 개라고 표현했다.

그녀와 같이 사진 찍을 그림을 두 개 골랐다.
하나는 그녀가 처음으로 그린 자신의 초상화.
또 하나는 ‘여러 가지의 나’라는 또 하나의 자화상이다.
내가 고른 그림이 공교롭게도 둘 다 그녀의 자화상이었다.

초기의 초상화엔 그녀의 꿈이 보였다.
그 다음의 초상화엔 현재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었다.

‘여러 가지의 나’라는 초상화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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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해 나가면서
내 안의 여러 가지의 내가 깨어나고 있어.
어떤 나를 원해?
기대해도 좋아!’

누군가가 그녀에게 ‘미긍’을 ‘미친 긍정’이라고 했다고 했다.
‘어떤 나를 원해? 기대해도 좋아!’
아름답고도 미친 긍정이 아닐 수 없었다.

취재 후, 그녀를 ‘미긍교주’라 부르게 되었다.
겉보기엔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게 그녀의 삶이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보여주는 ‘미긍’ 에너지가 놀라웠다.
더구나 그 삶이 오롯이 밴 작품도 ‘미긍’이었다.

그녀의 삶을 듣고 작품을 보며 ‘아름다운 긍정’의 메시지가 좀 더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그녀를 ‘미긍교주’라 칭하고 ‘1호 신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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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28일 저녁이었다.
서로 카카오 톡을 주고받는 중, 그녀가 갑자기 또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어머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는 중, 운전연수 중인 뒤차가 추돌했다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그녀는 또 입원을 했다.
고개를 숙일 수 없어 그림 작업을 못할 지경이라고 했다.

위로 겸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바깥에 나가면 안 되는 팔자인가 봐요. 집에서 그림 작업만 하라는 계시인가 보네요.”

강작가에게서 답이 왔다.

“이제 겨우 세 번인걸요. 30번, 300번 사고가 나 봐라. 내가 밖에 안 나가나. 그까짓 교통사고로는 ‘미긍’을 못 막는다 전해~라!”

권혁재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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