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55·사진)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담당 국장은 아태 지역을 관장하는 최고위 인사다.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도 그의 관할이다. 이 국장은 최근 한국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닮아갈 지 모른다는 지적을 많이 한다. 우리로선 듣기 싫은 쓴소리다.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코리아소사이어티 좌담회에 참석한 이 국장을 만났다.
-한국 경제가 당면한 최대 과제는.“중장기적 체질 개선이다. 기존 성장 모형이 한계에 달했다. 제조업과 수출만으로는 고학력 청년 실업문제 등을 해결하기 어렵다. 제조업 수출은 지속되는데도 취업자는 오래전부터 줄어오고 있다. 우리 경제가 제조업 발전을 통해 고용과 소득·수출증대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수 있는 수준은 이미 넘어섰다. 중장기적으로 성장 잠재력을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다.”
경제 체질 개선에는 구조 개혁이 필연적이다. 그러나 한국에선 이게 어렵다. 정부의 개혁정책은 매번 국회에서 좌초하고 있다. 세계가 바람직한 협력모델로 꼽아온 노사정 위원회는 붕괴 직전이다. 외환위기로 IMF에 의한 강제 개혁을 당한 이후 우리 손으로 의미있는 개혁을 일궈낸 것이 얼마나 될까. 이 대목에서 그의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답습 우려’가 나온다.
“가야할 방향에 대해선 공감하면서도 이념과 이해관계 갈등으로 중요한 구조조정 정책에 대해 정치적 합의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그로 인해 경제정책이 구조 전환보다는 단기적 부양책에만 의존하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이 1990년대 거품 경제 붕괴 이후 정치력 부재로 의미있는 구조개혁을 못하고 단기 부양책에만 매달려 '잃어버린 20년'을 겪은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이 국장은 “한국은 토론은 많이 하는데 절충과 타협이 이뤄지지 않아 새로운 개혁을 도입하지 못하고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외환위기 직전 한국경제에 쏟아졌던 ‘말은 많은데 행동은 없다(Many Talks, No Action)’ 비판과 같은 맥락이다. 한국은 그때 결국 ‘신뢰의 위기’로 치달았다.
절충과 타협 안 돼 잠재성장률 하락그는 시급한 구조개혁으로 교육·의료·법률 등 서비스 분야의 개혁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 등을 들었다. 모두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분야다. 그렇지만 그런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지 못하면 잠재성장률은 계속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노동시장 개혁에 대한 입장은.“노동시장이 유연해져서 기존 산업에서 신성장산업으로 노동력이 빨리 이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동시에 정규직을 더 많이 뽑도록 인센티브를 주는 노력도 필요하다. 비정규직 문제는 소득 불평등 문제를 심화시키기 때문이다. 무조건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해서 기업 활동에 도움을 주자는 예전 정책의 한계를 많이 봤다.”
그에게 올해 한국 경제 성장 전망에 대해 물었다. 그는 “한국경제 전망은 2월말 발표될 예정”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대신 힌트를 줬다.
“최근 IMF는 올해 세계 경제성장 전망치를 기존의 3.6%에서 3.4%로 낮췄다. 선진국 성장률도 0.1%포인트 내렸다. 이런 걸 고려할때 한국 전망치도 다소 하향 조정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10월 IMF의 2016년 한국 성장률 예측치가 3.2%인 것을 감안하면 새로운 성장전망치가 3%선을 지킬수 있을지가 관심이다. 하지만 당장의 성장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장잠재력이다. 이 국장은 “한국은행에서 최근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인구 고령화 등의 요인으로 인해 3.0~3.2% 정도로 낮아졌다고 발표했는데, IMF도 비슷한 견해다”고 말했다.
IMF가 분석한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3%대 초반으로 내려앉은 것은 처음이다. 지금까지는 3.5%였다. 구조조정의 골든타임을 놓치면서 경제의 역동성과 활력이 떨어진 것이다. 정치의 실패가 경제를 중진국 함정으로 점점 밀어넣고 있다는 세간의 지적은 아주 틀린 얘기가 아니다.
-한국의 가계 부채 위기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가계부채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가계부문이 충분한 금융자산도 보유하고 있고, 부동산 자산과 연계돼 있다. 원금상환과 이자 부담이 성장을 위축시킬수 있겠지만 단기적으로 금융시장에 위험요인이 될 것으론 보지 않는다. 다만 향후 베이비 붐 세대가 본격 은퇴를 할 경우 부채를 상환할수 없는 극빈 노령층을 양산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IMF, 중국 경제 경착륙으로 보지 않아”한국 경제를 얘기할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중국이다. 중국의 기침은 한국에 독감을 퍼뜨린다. 이미 증시도, 외환시장도 차이나 쇼크에 휘청거리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는 중국 경제의 경착륙(hard landing)을 전망하는 전문가가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이 국장은 “중국 경제 전반에 대해 너무 비관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중국이 하드랜딩 할 것으로 보나.“하드랜딩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있다. IMF는 중국의 올해 성장률을 6.3%, 내년 6%로 예상한다. 중국 경제가 투자와 수출 위주에서 소비와 서비스 산업 위주로 전환해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바람직한 성격의 성장 둔화다. 제조업 분야가 예상보다 부진하지만 경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서비스 부문이 8% 중반의 높은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중국과 같은 규모의 경제가 매년 7~10%씩 성장하리라고 예상할수는 없다. 성장률이 2014년 7.4%, 2015년 6.9%에서 6%대 초반으로 떨어지는 것을 하드랜딩이라고 정의한다면 하드랜딩이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지속가능한 성장으로 이행하는 과정으로 보고 있다. 이미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다. 그래서 하드랜딩이란 표현을 쓰지 않는다.”
-중국의 경기둔화가 예상된 것이라면 시장은 왜 이렇게 떠는가.“세계 2위의 중국 경제가 수출중심에서 내수 중심으로 전환하고, 또 그간 닫혀있던 금융시장을 개방하는 과정이 반드시 평탄할 수는 없다. 금융시장에 여러 굴곡이 있을 수 있다. 다만 원자재 수출국 등에 미치는 파급(spill over) 효과가 생각보다 큰 것 같다. 중국 당국이 6% 이상 성장을 위해 통화 팽창 정책을 펼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위안화 평가절하가 나타나는 경향도 있다.”
-월스트리트에선 중국 당국이 시장 개입을 멈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중국은 아직 선진화된 시장이 아니다. 금융시장이 과도하게 출렁일 때 일정수준의 개입을 통해 시장을 안정화시키는 것은 바람직하다. 가까운 장래에 중국의 금융시장이 완전 자유화할 것으로 기대해선 안 된다. 중국은 금융시장 자유화와 환율시스템 유연화 등을 단계적으로 진행해갈 것이다. 중국 당국은 투자자와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시장과의 소통 노력을 배가해야 한다. 신뢰가 형성되기까지 당분간 시장의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경제는 이런 중국의 패러다임 전환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이 국장은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성장률이 둔화된다고 해서 중국 특수가 모두 사라졌다고 보는 것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중국의 경제규모가 과거보다 훨씬 커졌으니 중국 시장의 총수요 규모는 크게 줄어든 것이 아니다. 앞으로는 소득이 늘어난 중국 중산층이 원하는 상품에 경쟁력을 가진 기업과 국가만이 중국 특수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의료 서비스와 관광·화장품과 같은 고급 소비재, 문화 콘텐트 등이 좋은 사례다.”
뉴욕=이상렬 특파원 isa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