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정규직부터 양보를” vs “재계 요구만 들어주니…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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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호 3 면

정부는 22일 ‘저성과자 해고,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에 관한 행정지침을 발표했다. 23일 민주노총 주최로 열린 서울광장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정부 지침에 항의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민노총은 25일부터 무기한 파업에 돌입할 예정이다. 김춘식 기자

노동개혁을 위한 노사정 샅바 싸움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17년 만에 이뤄진 대타협 합의문을 한국노총이 백지화하자 정부가 사흘 만에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가이드라인을 들고 나왔다. 민주노총을 포함한 노동계는 전면 투쟁에 나섰다. 파견근로자 보호법을 포함한 노동개혁 관련 5대 법안의 입법은 여전히 난망이다. 노동개혁의 물꼬를 틀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지난 21일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와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가 마주 앉았다.

권혁 부산대 교수

-정부가 노동계 반발을 샀던 양대 지침을 강행하고 나섰다.


권혁 부산대 교수=정부는 이번 발표로 눈에 보이는 성과에만 집착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일반해고와 취업규칙을 바꿀 수 있도록 한 양대 지침 자체를 성과로 생각해선 안 된다. 지침의 이행이 노동개혁은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개혁이 실효성을 갖기 위해선 노사정 합의와 협력이 필수적이다. 지금이라도 새 판을 짜야 한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이번 행정지침은 일방적 발표다. 절차상으로 봤을 때도 충분한 논의가 없었다. 해고 절차를 엄격하게 만들었다고 정부는 주장하지만 재계가 요구하던 해고 유연화를 실현한 편향된 내용이다. 경제 살리기, 일자리 만들기를 위해 결국 노동자에게만 고통을 전담하라는 것에 불과하다. 이번 정부의 지침 강행으로 고용 불안과 같은 위험한 파급효과가 예상된다. 무(無)노조 사업장에선 지침이 법과 같은데 이번 지침 강행으로 집단적 반발과 소송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권=지침은 말 그대로 권고에 불과하다. 지침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법적 불이익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장에 미칠 무게감이 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해고 남발로 인한 소송으로 노사 간 분쟁이 급증할 수 있다. 노사가 공감할 수 있는 근로자 평가방법을 마련해야 하는 숙제도 있다. 2~3년에 걸쳐 부작용과 순작용을 추적해 문제 있는 부분을 고치고, 영 아니다 싶으면 백지화할 수도 있다는 각오를 정부에서 보여줘야 한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

-노사정위원회의 파탄 원인은 어디에 있나.


권=노사정이 각각 남 탓을 하지만 남 탓할 일이 아니다. 정부는 결과에 집착하다 보니 조급했고 전략이 없었다. 노동계는 구체적인 대안 제시를 못했다. 자칫 조직 이기주의로 비춰질 수 있는 오해를 자초했다. 대화의 틀을 승부로만 봤다. 일자리가 없는 청년과 비정규직 근로자는 우리 사회가 보호해야 할 약자다. 이들을 위해 어떻게 양보할까를 같이 고민하자는 자리였는데 승부의 구조가 되면서 노사 갈등 구조가 위원회로 옮겨온 듯한 양태로 변질됐다.


이=청년 실업난의 가중과 비정규직의 문제, 노동 소득 분배의 악화 등 노동시장에서 비롯된 문제를 쌓아놓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어떤 방향으로 풀 것인가에 대한 시각차가 존재했다. 정부는 노사의 입장을 중재해 해법을 이끌어냈어야 했다. 그런데 경제 살리기를 위해 기업들이 요구하는 것을 우선하다 보니 노사정 협의 과정은 ‘기울어진 운동장’이 됐다. 정부가 분란을 만든 셈이다. 노사정 대타협 파탄 과정엔 우리 사회의 미숙성이 반영돼 있다. 우리의 실력이 그만큼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노동시장 개혁을 위해 가장 먼저 해결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은.


권=노동개혁 진행 양상을 보면 이름 붙이기 싸움 같다. 내용보단 명분 싸움을 한다는 것이다. 청년 구직, 일자리 문제라고 말하는 순간 노동계는 이를 이겨낼 수가 없다. 또 ‘쉬운 해고’라고 이름 붙이면 정부·기업과 노동계 간의 프레임 싸움이 된다. 이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정규직 없는 사회는 바람직하다. 하지만 이 문제를 일거에 해결 가능한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비정규직이 늘고 있다. 단번에 비정규직을 없앨 수 없다면 한 걸음씩 나가는 것이 낫다. 차별을 없애고 근로조건을 향상시켜 가면서 점차 비정규직을 줄일 방법을 찾아나가면 된다. 개혁을 해야 한다는 방향은 모두 공감하고 있으면서도 실현 방법을 놓고 극단적인 대립을 하다 보니 개혁 자체가 봉쇄됐다. 협상의 당사자들이 변화 자체를 거부하게 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두 가지가 가장 큰 문제다. 첫째 노동시장의 이중 구조다.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 청년-기성세대 간에 다른 규칙이 적용된다. 비정규직을 줄이고 차별을 해소해야 한다. 청년 취업난은 일자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좋은 일자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좋은 일자리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찾아야 하는 것이 개혁과제다. 그 다음은 고용 안정화다. 그런데 정부는 이런 문제를 풀 능력도 의도도 없는 것 같다.


-현실적인 대안이나 해법을 찾기 어렵다.


이=권 교수께서 ‘쉬운 해고’ 프레임을 말씀하셨는데 이미 고용불안이 높아져 있는 상황이다. 기업 이익 중 노동자의 몫은 1998년 이후 지속적으로 줄고 있다. 왜 정부는 노동자에게만 경제 살리기를 위해 희생하라는 주문을 반복하는가. 비정규직 문제도 마찬가지다. 비정규직은 을이다. 자의에 의해 비정규직이 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쩔 수 없이 비정규직이 되는데 사용자와 정부가 객관적으로 상황 인식을 함께해야 하는 것이 먼저다.


권=고용시장에서의 음성적 해고가 가장 큰 문제다. 사용자는 근로자를 ‘구두로 해고할 수 없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면에선 해고 가이드라인 같은 제도적인 양성화의 필요성은 있다. 그간 우리는 해고제도를 건드리는 것 자체를 터부시해왔다. 고용이 불안한 근로자들에 대한 보완 장치도 필요하다. 비정규직은 고용 안정성을 포기하는 형태인 만큼 이론적으로는 정규직보다 더 대우를 잘해 줘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정규직의 근로조건을 우선하고 비정규직의 근로조건은 미뤄왔다. 노·노 간의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다. 실효적으로 근로조건을 높일 방법이 있다면 대기업 정규직의 양보도 필요하다.


-노사정위는 깨졌고 개혁은 답보 상태다. 물꼬를 트는 역할은 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가.


이=여전히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 노동시장 개혁은 노동자들의 삶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이다. 일방이 밀고 나가기엔 많은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다. 최대한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는 접근이 필요하다. 진정 개혁이 필요하다면 노와 사뿐 아니라 청년·비정규직 등 노동 약자까지 포괄하는 사회적 대화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가 스스로 답을 내놓고 노사정위를 요식적 절차나 들러리로 보면 파탄에 이를 수밖에 없다. 국민 대타협기구처럼 균형감을 갖춘 대화의 장을 만들고 참여자들이 스스로 의제를 가져와 대화와 타협을 해야 한다. 정부는 심판만 보면 된다.


권=대화 참여의 범위와 외연을 넓히자는 데 공감한다. 중요한 것은 참여자의 의식과 태도다. 자기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들어와선 안 된다. 이 사회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를 놓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자리라야 개혁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실마리를 풀어야 하는 주체는 정부다. 노동계는 사회적 약자다. 먼저 손을 내밀고 끌어안아야 하는 것은 정부다. 노동개혁은 과정이 중요한 것이지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대화와 협상, 파기도 개혁의 연속선상으로 봐야 한다. 불협화음도 대화의 과정이란 것이다. 노동개혁은 과정이 중요하고 10년, 20년이 걸리는 열린 과제다.


이=한국판 ‘유연한 고용안정’을 만들어야 한다. 재계는 고용 인력을 줄이고 인건비를 절감하는 데 대한 과한 집착을 내려놓고, 노동계는 기득권을 벗어나 타협해야 한다. 시장의 변화, 기업 여건의 변화에 따른 직무 재배치나 임금 조정에 대한 타협을 통한 노사 공생이 필요하다. 독일과 같은 서구 선진국은 노사 공생을 위한 규범이 있다.


권=노동개혁은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다. 정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따라오라’고 한다. 이는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목표는 선진적이지만 방법은 구시대적이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선진적인 수단과 방식을 써야 한다. 대한민국의 노동개혁은 자기 혁신에 대한 약속을 기초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은 실망할 수밖에 없다. 노사정은 개혁의 과정에서 갈등은 불가피하지만 국민의 시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정부는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지 않으면 힘이 없다. 노동계도 마찬가지다. 70~80년대만 하더라도 국민은 노동계를 응원했다. 하지만 지금은 귀족노조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희생하라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눈높이에 맞게 다가가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지속 가능한 성장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사정이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국민의 시선이다.


이=갈등 해결을 위한 첫 번째 단계는 팩트 파인딩(fact finding)이다. 문제가 무엇이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부터 객관적으로 확인해야 협상 당사자들이 대안을 찾고 수용할 수 있다. 우리는 그간 아전인수식의 사실만 들고 와서 자기 주장만을 펼쳐왔다. 현장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파악한 뒤 접점을 찾아야만 노동개혁을 지켜보는 국민으로서도 신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