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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출된 저축은행 물건 수백 건 공매…제프리 쿤스·박수근·웨민쥔 작품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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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미국 애리조나주 투손에 있는 미 309 항공 유지 및 재생비행단( 309 AMARG). 11㎢(333만 평)의 부지에 4400대가 넘는 퇴역 전투기와 정부 소유 항공기들이 잠들어 있다.

[현장 속으로] 문 닫은 금융사 뒷정리하는 파산재단 가보니

일명 ‘비행기 무덤(The Boneyard)’으로 불리는 이곳은 2009년 영화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 등 영화의 무대로 등장해 한국인에게도 친숙하다.

 수천 대의 항공기가 나란히 줄 서 있는 ‘비행기 무덤’처럼 장관(壯觀)도 아니고, 할리우드 영화의 무대도 아니지만 한국에는 ‘금융회사의 무덤’이 있다. 퇴출된 금융회사의 마지막 뒷정리를 책임지는 파산재단이다.

1996년 예금보험공사가 생긴 뒤 외환위기와 2011년 저축은행 사태를 거치며 지금까지 490개의 금융회사가 문을 닫았고, 그중 446개는 파산이 종결됐다. 현재 남아 있는 파산재단은 44개, 대부분(40개) 저축은행이다.

 파산재단은 금융회사의 남은 자산을 팔아 채권자들에게 나눠준 뒤 소멸한다. 예보에 보험을 든 금융회사가 망하면 예보가 원리금을 합해 1인당 최고 5000만원까지 금융회사를 대신해 예금자에게 지급하기 때문에 예보 역시 채권자가 된다. 파산재단이 남은 자산을 잘 팔아야 공적자금을 많이 회수할 수 있는 것이다.

심성욱 부산저축은행 파산관재인은 “시장에서는 금융감독원을 ‘의사’로, 예보의 파산재단은 ‘장의사’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금감원은 살아 있는 금융회사의 건강(건전성 감독)을 체크하지만 예보 파산재단은 금융회사의 장례를 치러 주기 때문이다.

 파산재단에는 예보에서 파견된 파산관재인(대리인)과 퇴출 금융회사에서 일하던 직원 일부가 보조인으로 근무한다. 초기에는 변호사들이 파산관재인으로 많이 선임됐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부산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2000년 전후 동남은행과 신세계종금 파산관재인을 맡았다. 2001년부터 예보에 보험을 든 금융회사가 파산하면 예보가 파산관재인을 맡고 있다.

 현재 파산이 진행 중인 44개 파산재단의 매각 물건은 올해 1월 15일 기준으로 부동산·미술품 등 782건, 최저공매가 기준으로 1조6510억원어치에 달한다. 예보는 그동안 저축은행 미술품 등 1778점을 국내외 경매에 출품해 1327점을 매각하고 205억원을 회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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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재단이 내놓은 유명 작가의 작품. 위쪽부터 제프리 쿤스의 ‘라일락 카우’. [사진 예금보험공사]

가장 최고가로 팔린 미술품은 2014년 홍콩 경매에서 21억1000만원에 매각된 세계적 현대미술가 제프리 쿤스의 유리작품이다.

 현재 매각이 진행 중인 미술품 중에서도 제프리 쿤스의 ‘라일락 카우(Lilac Cow)’가 12억6000만원(이하 최저공매가)으로 가장 비싸다. 동물 형태의 거울을 통해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담아냈다.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대표 작가인 박수근의 ‘줄넘기하는 아이들’(6억3000만원)과 1980년대 중국의 ‘85 신사조운동’에 동참했던 웨민쥔(岳敏君)의 ‘삶(Life)’(1억5800만원)도 눈에 띄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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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의 ‘줄넘기하는 아이들’. [사진 예금보험공사]

‘85 신사조운동’은 80년대 중반 정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개인의 내면을 중시하며 창작과 사상의 자유를 추구하는 청년 작가들의 예술운동이다.

 ‘비행기 무덤’이 2차 세계대전과 한국·베트남 전쟁의 역사를 담고 있는 것처럼 파산재단이 매각하는 물건을 보면 저축은행의 무리한 투자, 오너의 도덕적 해이, 금융당국의 부실한 감독을 읽을 수 있다.

 예보가 매각하고 있는 물건 중에 미술품이 311건 36억원어치에 달한다. 저축은행이 직접 투자했거나 담보로 받았거나 오너 등 경영자가 소장하고 있던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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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작가 웨민쥔의 ‘삶(Life)’ . [사진 예금보험공사]

왜 이렇게 미술품이 많을까. 제프리 쿤스의 ‘라일락 카우’는 프라임저축은행이 담보로 받았고, 박수근의 작품은 부산저축은행 등 3개 저축은행이 미술품 투자를 위한 PF를 하다가 담보로 취득했다. 웨민쥔의 작품은 미래저축은행이 직접 투자했다.

예보 파산관재인들은 “투자 목적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저축은행 오너의 취향이 투자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했다.

강원도 춘천 도민저축은행의 양태영 파산관재인은 “파산한 저축은행은 하나같이 규정대로 따르지 않았다”며 “1인 오너의 입김이 절대적이어서 내부 통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도민저축은행의 담보물 중에는 항공기보다 빠르다는 ‘부가티 베이런’ 등 고가 외제차 26대가 있었다. 검찰이 증거물로 압수한 부가티 등 3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공매로 팔았거나 재판을 거쳐 다른 주인을 찾았다.

 현재 파산재단 매각 리스트에는 부동산이 1조6333억원으로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담보로 받았거나 무리하게 PF 투자를 했다가 실패한 유산이다. 저축은행은 지역 밀착형 금융회사다. 탄탄한 지역영업망을 토대로 ‘가늘고 길게’ 살아갈 수 있었는데 왜 무더기로 문을 닫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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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훈 동국대 경영학부 교수는 “80년대 후반 미국 저축대부조합(S&L)들이 대거 파산하게 된 것은 업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고위험 투자로 몰린 탓이 크다는 연구가 있다”며 “한국 저축은행도 가계대출에 주력하는 시중은행과 대부업체 사이에서 경쟁 압박을 느끼면서 부동산 PF 같은 고위험 투자에 나서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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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금융당국의 화두는 금융개혁이다. 경쟁과 혁신으로 기존의 판을 흔드는 게 핵심이다. 강 교수는 “경쟁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감독당국이 금융회사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보완장치도 함께 마련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S Box] 예보 공매, 중개수수료 없어…감정가의 60~70% 선 거래

예금보험공사는 지난 한 해 3100억원어치의 파산재단 부동산을 매각했다. 부동산을 파는 ‘큰손’인 셈이다. 현재 매물로 나와 있는 대표 물건 중에 서울 가락동 제일오피스텔 빌딩(117억원, 이하 최저공매가 기준), 서울 충무로 2가 하이해리엇 빌딩(128억원) 등 100억원이 넘는 물건이 꽤 있다.

개인들이 투자할 만한 물건도 있다. 예보 홈페이지(www.kdic.or.kr) 첫 화면 상단의 ‘예보 공매 정보’를 클릭하면 공매 정보를 한 번에 검색할 수 있다.

성상환 예보 회수총괄부 자산관리팀장은 “개인의 경우 5억원 정도의 상가·오피스텔에 대한 수요가 많다”며 “예보 공매는 중개수수료가 없는 게 장점”이라고 했다. 공매나 경매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 투자자는 권리관계가 복잡한 부동산은 아예 쳐다보지 않는 게 좋다.

성 팀장은 “저축은행이 자기 명의로 보유했던 부동산처럼 권리관계가 단순한 일반 부동산을 고르는 게 좋다”며 “최저공매가는 감정가의 50%에서 시작해 보통 감정가의 60~70% 선에서 거래된다”고 말했다.

실제 공매는 전국 10곳의 합동공매장에 가야 한다. 매달 넷째 목요일에 열린다. 주요 미술품은 서울옥션 등 전문 경매회사에서 살 수 있다.

서경호 기자 prax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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