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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임마누엘 칼럼

한국에서 가장 시급한 일, 명칭 바로잡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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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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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

한국 경제와 정치에 대한 일반 국민의 불만이 엄청나다. 정부나 기업이 표명하는 우선순위와 서민 생활 사이의 괴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괴리 심화의 원흉인 ‘나쁜 사람들’이 누군지 밝혀내겠다는 욕구가 국민 사이에서 점증하고 있다.

 권한이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많은 이가 보통 사람들이 처한 곤경에 대해 무관심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국가 정책과 서민의 경제적 현실 사이의 단절을 초래한 원인은 아니다. 그보다는 시민과 통치자 사이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계약이 붕괴된 게 진짜 원인이다.

 이러한 근원적인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어느 정치인이 최근에 무슨 말을 했는지 곱씹는 게 아니다. 공자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명제인 ‘정명(正名)’을 살펴보는 편이 낫다. 공자는 명칭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정명’이 좁힐 수 있다고 봤다. 즉 제도와 직능을 기술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명칭’, 그리고 제도와 직능이 시간 속에서 진화하고 변화하는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를 축소시킬 수 있는 수단이 ‘정명’이라고 공자는 파악했던 것이다.

 우리는 정부·대학·변호사·의사·기업과 같은 제도나 직능의 명칭을 사용할 때 그 명칭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와 직능이 수행하는 기능은 지난 10여 년간, 특히 지난 5년간 급속하게 변화했다. 예를 들면 은행은 기술적으로 진화했고 극적인 방식으로 세계화됨으로써 은행이 사회 속에서 수행하는 기능과 목적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슬프게도 모든 매체가 ‘은행’이나 ‘국회’ 같은 제도들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해 보지 않는다. 매체들이 명칭을 원래대로 계속 사용하기 때문에 일반 국민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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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눈에 비치는 거리와 건물들은 예전에 비해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학교와 정부기관, 기업들은 기능과 목적의 측면에서 과거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화했다. 사회의 많은 불만은 이러한 제도들이 하는 일에 대한 기성 관념과 변화된 현실 사이의 격차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정치’라고 부르는 문화공간보다 더 혼란스럽고 또 ‘정명’이 더 필요한 영역은 없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정치’라는 용어는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것이다. 정부의 정책 결정을 둘러싼 다양한 이익집단 간의 활동을 뜻하는 통칭(通稱)이다.

 그런데 ‘정치’라는 새로운 개념은 기존의 예(禮·사람과 기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철학)와 정(政·거버넌스의 학문)과 의(義·의무)를 하나로 결합했다. 전통 한국 사회에서 예·정·의는 개별적인 개념이었으며 각기 명료하게 정의된 개념이었다. 이 세 가지를 합친 정치는 개념적인 혼란을 낳았으며 혼란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우선 정치철학적 의미의 정치인 ‘예’는 이상적인 인간 사회란 무엇이며, 어떻게 조직돼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이다. 미학과 형이상학의 영역을 포함하는 가장 높은 차원의 정치다. 정치철학은 비실용적이거나 모호해서는 안 된다. 또 정치적 실천이 공허한 제식이나 근시안적 흥정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재해석돼야 한다.

 그 다음에는 거버넌스를 의미하는 ‘정’ 측면의 정치가 있다. 정책과 법 제정과 실행의 개념으로 정부를 운영하고 조정하는 기술을 뜻한다. ‘정’은 기계공학과 유사한 면이 있다. 복합적인 시스템의 구조, 그리고 대립하고 수렴하는 힘들의 균형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익과 영향력을 의미하는 정치가 있다. 현대 정치의 이러한 측면과 완벽하게 상응하는 개념은 전근대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도 가장 근접한 것은 ‘의무와 결속’인 ‘의’의 개념이다.

 영향력과 권위를 이용해 재정적 이득을 취하거나 반대로 돈을 이용해 영향력과 권위를 얻는 프로세스는 복합적인 사회에서는 결코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모든 재정적 영향력으로 억압을 시도하는 것은 공산주의 체제라는 위험한 절대주의로 가는 길의 문을 여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의 비즈니스 측면은 오직 정치 프로세스의 일부분이어야만 한다. 이것이 앞서 언급한 ‘예’와 ‘정’의 영역을 완전히 가려 버리도록 허용해서는 결코 안 된다.

 ‘정부는 왜 더 이상 의미 있는 정책을 설계하고 실행할 능력이 없는가’에 대한 정직한 대답을 우리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정치인 개인을 공격하거나 정당들을 비난하는 것은 충분치 않을뿐더러 도움도 되지 않는다.

 진정한 답을 얻기 위한 첫걸음은 정치라는 개념 자체에 내재하는 이론적 혼돈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적 혼돈이 유권자와 정치인으로 하여금 정치 과정에 있어 완전히 다른 상이한 개념을 혼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의 혼돈 때문에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기능 장애를 못 보고 있다. 우리는 우선 시민들이 참여하는 상이한 활동영역을 구별하고 그러한 행동들이 어떻게 진화하고 변화하는지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