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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민란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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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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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 소설가

“민란은 가슴에 절망을 품었다.” 예상보다 큰 동력을 얻은 ‘2차 안철수 현상’을 살피노라면, 프랑스 사상가 자크 엘륄의 얘기가 떠오른다. ‘1차 안철수 현상’은 금융위기가 낳은 경제적 절망이 동력이었고 이번엔 마비된 정치권에 대한 절망이 에너지를 공급했다.

 안철수 현상은 본질적으로 민란이다. 민란의 틀로 살피면, 모습이 보다 또렷해진다.

 활기찬 사회에서 사람들은 세계에 대한 합리적 설명과 현실적 정책을 찾는다. 앞날이 암담하면, 사람들은 즉각적 구원을 찾는다. 그래서 민란의 중심은 구세주다.

 구세주는 초인적 능력을 지녀야 하므로 신비로운 면모를 지닌 사람이 그 역할을 맡게 된다. 당연히 정치 경험이 없어 ‘때 묻지 않은’ 사람이 유리하다. 안철수 의원은 그런 사정 덕분에 단숨에 정치 지도자로 떠올랐다.

 안 의원은 저번엔 미지수였지만, 이제 능력이 드러났다. 그래서 민중의 절망은 저번보다 작지 않지만, 이번 바람은 정치권을 공황으로 몰았던 저번의 태풍이 못 된다.

 민란과 혁명은 다르다. 민란은 작은 혁명도 실패한 혁명도 아니다. 혁명은 가슴에 희망을 품었고 교리와 정책들을 갖췄다. 가슴에 절망을 품은 민란은 무엇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저 무엇을 반대한다. 자연히 민란은 보수적이거나 반동적이다.

 안 의원이 내건 ‘새 정치’는 그가 기성 권력에 반대함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가 밝힌 ‘새 정치’의 내용은 모범 답안 같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민란의 지도자라는 사실이 다시 확인된다. 근본적으로,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에선 절망의 에너지가 크게 쌓이지 않고 대안들은 현재의 체제보다 매력적이지 못하므로 혁명이 일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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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란이 성공하려면, 지도자가 구세주의 신비로움을 잃지 않아야 한다. 자신에 대해 처음 말했을 때, 안 의원은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과는 다르다고 밝혔다. 그런 발언은 자신을 이념적 틀로 정의해서 신비로움을 걷어 냈고 잠재적 추종자들을 줄였다. 정체가 모호할수록,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나름으로 해석할 여지가 클수록 지도자는 더 큰 세력을 거느린다.

 민란 세력은 조직되지 않았으므로 응집력이 약하다. 당연히 태풍처럼 단숨에 기존 질서를 휩쓸어야 성공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민란의 지도자는 지배 세력과 협상해선 안 된다. 협상은 구세주를 상대방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신비로움에 때를 묻힌다. 아울러 지연 작전을 펴는 집권 세력에 말려들어 추종자들이 흩어진다. 대통령 후보였을 때 안 의원은 재야 지도자들이 나름 이념적·종교적 또는 정치적 기득권을 대표하며 그래서 자신에게 적대적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구세주인 자신에게 복속하라고 그들에게 요구하지 못하고 그들의 조정에 순응했다. 결국 그는 문재인 후보와 협상에 나섰고 그의 태풍은 열대성 저기압으로 사그라졌다.

 역사적으로, 민란은 성공한 적이 드물다. 민란에 가담한 민중을 군대로 조직하는 것이 워낙 힘들었으므로 지배 계급이 일부라도 가담해야 성공했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에선 칼이 아니라 표가 말한다. 그래서 민란은 민중주의 정당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다소간에 목표를 이루고 때로 집권하기도 한다. 경제가 절망적인 그리스에서 단숨에 집권한 시리자는 전형적이다.

 그러면 민란의 한계를 지닌 ‘2차 안철수 현상’은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민란의 1차적 효과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체제에 대한 충격이다. 그래서 그 체제가 다시 움직이거나 무너지게 만든다.

 말단 관리인 진승이 절망적 상황에서 일으킨 반란은 연쇄반응을 일으켜 잘 조직된 진(秦) 제국이 무너지도록 만들었다. 서양 문명의 배척을 근본으로 삼고 흥선대원군의 복위를 정치 프로그램으로 내건 동학교도의 봉기는 청일전쟁을 촉발해 동아시아의 역사를 바꿨다. 민중은 멀리 내다보지 못하지만, 그들의 봉기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을 낳아 체제를 흔들고 역사를 바꾼다.

 ‘국민의당’은 이미 정치권에 긍정적 충격을 줬다. 북한의 인권과 테러에 대응하고 정부가 갈구하는 경제법안들을 호의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진보적이다. 특히 안 의원은 “총선에서 야권 연대는 없을 것”이라고 선언해 자신이 실패에서 배우는 정치가임을 보여 줬다.

 민란의 함성은 사람들의 가슴에 울린다. 진승, 스파르타쿠스, 황소, 망이, 푸가초프, 홍경래, 전봉준, 사파타-이것보다 가슴을 더 시리게 하는 명단이 있을까? 몇 해 전 자신을 따라나섰던 사람들이 아련해진 민란의 추억을 떠올리게 할 수 있다면, 이번엔 달든 쓰든 결과를 보겠다는 의지가 있음을 그들이 믿도록 할 수 있다면, 안 의원은 방해주의자들(obstructionists)에게 막힌 정치권을 시원히 휩쓰는 태풍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복거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