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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요약 ③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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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8호 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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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탑승한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으로 들어왔다. 뤼순 감옥에서 쓴 안중근의 자서전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에서는 이때를 이렇게 회상하였다. 그는 체포될 때 하늘을 향하여 큰소리로 “대한만세(大韓萬歲)”를 세 번 외친 후 정거장 헌병분파소로 잡혀 들어갔다고 한다.


안중근 수사 기록인 『공판시말서(公判始末書)』에 따르면 안중근은 “‘의병’ 참모중장(參謀中將)으로서 결행한 것”이며, “이번 거사는 나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사형이 집행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했는데, 그 핵심 내용은 한·중·일 세 나라가 각기 독립국을 유지하는 대등한 상태에서 서로 협력하면서 서양 세력의 침략을 방어하고 동양 평화와 세계 평화를 성취하자는 것이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안중근은 재판장 마나베(眞鍋十藏)와 고등법원장 히라이시(平石)에게 “동양평화론을 완성하고 싶으니 사형 집행 날짜를 한 달 정도 늦춰 달라”고 요구했고 히라이시는 “설사 몇 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답했다. 이를 사실로 믿은 안중근은 공소권 청구를 포기하고 『동양평화론』 집필에 전념했으나 일제는 약속을 어기고 1910년 3월 26일 사형을 집행했다.


순종 3년(1910) 8월 22일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의 정식 명칭은 ‘일한병합조약(日韓倂合條約)’이었다. ‘합방(合邦)’이 ‘두 나라가 합친다’는 뜻이라면,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가 고안한 ‘병합’이란 말은 ‘강국이 약국을 삼킨다’는 일제의 시각이 그대로 담긴 말이었다.


김택영이 중국에서 쓴 황현의 소전(小傳)인 『성균생원 황현전(成均生員黃玹傳)』에는 “(국망 소식을 듣고) 황현은 비통하여 음식을 먹지 못하다가 하룻밤에 절명시(絶命詩) 넉 장을 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난리 속에 지내다 머리가 세었네, 몇 번이나 버리려던 목숨이었나, 오늘은 진실로 어찌할 수 없어 바람 앞의 촛불만 하늘을 비추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 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세상이 이미 가라앉아 버렸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천고를 회고하니, 인간 세상 식자 노릇 어렵구나.”


사대주의적 유학자들이 만든 쇄국은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깨져나갔다. 이 시기 독립운동가들이야말로 국제화의 선구자였다.


국외에 독립운동 근거지와 군대를 만들어 결정적인 시기에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서 나라를 되찾자는 ‘독립전쟁론(獨立戰爭論)’ 구상이 나왔다. 이 운동은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다. 첫 번째는 을사늑약 직후이고, 두 번째는 망국 직후이다.


독립운동가 이관직(李觀稙)은 『우당 이회영 실기(實記)』에서 “1906년 여름 (이회영) 선생은 광복운동의 원대한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내에서만 행하는 것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이상설·유완무·이동녕·장유순(張裕淳) 등과 심심밀의(深深密議) 해서 광복운동을 만주에서 전개하기로 했다”고 전한다.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할 적임자로 손꼽힌 인물은 바로 이상설이었다. 이상설은 을사늑약 체결 후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1906년 망명길에 나선다. 대한제국의 고관을 역임한 이상설은 국제적 시야를 갖춘 인물로, 영어와 프랑스어에도 능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설은 용정촌(현재의 연길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 천주교 회장 최병익의 집을 매입해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연다. 그는 1907년 4월 용정촌을 떠나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갔다가 1908년 8월에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愛國同志代表者會議)에 참석하고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오는 등 세계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동아일보는 1920년 8월 2일 ‘봉천성 삼원보에 자치국(自治國)’이란 기사에서 ‘이천 호의 조선 민족이 모여 한족회가 다스리며 소·중학교 교육까지 시키는 작은 나라를 이뤘다’고 보도했다. 이주 한인들이 노천 군중대회를 통해 경학사(耕學社)를 건설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었다. 이들은 왕정을 배격하고 민의에 의한 민단 건설이란 민주공화제의 씨앗을 뿌렸다. 채근식이 『무장독립운동비사』에서 경학사를 “동삼성(東三省) 한국 혁명 단체의 효시(嚆矢)”라며 높이 평가하고,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훗날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가 되는 김학규도 “동삼성 한국 혁명 결사의 개시이자 동북 한국 혁명운동의 선성(先聲)이자 효시”라고 높이 평가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요약=김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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