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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원금 걱정 마세요” 믿었는데…땅 치는 ELS 투자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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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석 경제부문 기자

“아니 다른 설명은 됐고. 그래서 원금 보장된다는 거예요?”

 지난해 5월 은행에서 순번을 기다리고 있다 우연히 엿듣게 된 얘기다. 창구엔 50대 정도로 보이는 여성에게 젊은 은행 직원이 상담을 하고 있었다. 잠시 들었는데도 대화의 흐름은 쉽게 이해됐다.

고객은 “은행 이자가 너무 낮아서 정기예금에는 가입하고 싶지 않다. 이자가 조금 더 높으면서 안전한 상품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은행원은 주저 없이 주가연계증권(ELS)를 권했다.

은행원의 장황한 설명이 이어지자 50대 여성은 원금보장 여부를 재차 물었다. 우물쭈물하던 은행원은 “원금이 거의 보장되는 상품이라고 보시면 됩니다”라고 답했다.

그래도 아주머니는 선뜻 결정을 하지 못했다. 원금 보장 여부에 대한 질문과 ‘거의 보장’을 골자로 하는 답변이 몇 차례 더 오간 뒤에야 고객은 그 직원에게 투자금 500만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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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H지수 급락으로 이를 기반으로 한 ELS가 무더기로 원금손실 구간에 접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장면이다.

당시 고객의 가입 시점은 안타깝게도 H지수가 최고점에 이른 무렵이었다. 어쩌면 그때 ELS에 가입한 고객은 밤잠을 설치고 있을지 모른다.

지난해 수많은 투자자가 저금리에 떼밀려 ELS에 가입했다. 생소한 상품 앞에서 며칠 밤을 고민한 끝에 금융사를 찾았고, 창구에서도 주저주저한 뒤에야 결단을 내린 초보 투자자가 즐비하다.

결단의 결과는 참담하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H지수가 1월21일 장중 7825포인트까지 하락하면서 원금손실 구간에 접어든 H지수 기반 ELS 투자원금이 1조5475억원을 넘었다. 많은 투자자들이 손실 위기에 처했다.

 원유 파생결합증권(DLS)은 더 심각하다. DLS는 기초자산이 원유나 원자재 등 현물이라는 점을 빼면 ELS와 거의 같다. 원유값이 폭락하면서 원유DLS도 무더기로 원금손실 구간에 진입했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20일 현재 원금손실 구간에 진입한 원유DLS 상품은 470개, 투자원금은 8647억원에 이른다. 손실 가능성은 더 크다.

원유값 하락폭이 주가지수보다 훨씬 큰 데다가 만기가 3년~3년6개월인 ELS와 달리 원유DLS는 만기가 6개월~1년에 불과한 상품이 많다. 1조3000억원대인 미상환 잔액 중 절반인 넘는 7016억원의 만기가 올해 돌아온다. 손실을 만회할 시간이 부족하다.

 누구의 책임일까. 상품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투자한 투자자에게도 물론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무턱대고 ‘원금 보장 상품’이라며 권한 금융사의 책임은 훨씬 무겁다.

인터넷에는 “‘원금보장 상품인데 이자가 더 높다’는 금융사 직원 말만 믿고 ELS에 가입했다”는 투자자들의 탄식이 넘쳐난다. 정기예금 등 기존 상품 수요의 감소로 고민 중이던 금융사에 ELS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은 고마운 존재였다.

지난해 ELS 발행액은 77조원에 육박했다. 2003년 국내에 ELS가 처음 선을 보인 이후 최고액이다. ELS 판매 경쟁에 불이 붙었고 불완전 판매가 횡행했다. ELS를 원금보장 상품으로 둔갑시켜서라도 많이 팔아야 한다는 게 판매 창구의 지상과제였다.

한국 금융의 문제점으로 자주 지목되는 게 금융사에 대한 고객의 신뢰가 낮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팔면 그 뿐”이라는 판매 중심 사고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ELS·DLS 사태로 한국 금융사의 신뢰도는 또 한번 추락하게 됐다.

 금융위원회는 21일 이번 사태와 관련해 “ELS 판매채널 전반에 대한 점검을 통해 투자자들이 충분히 투자위험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ELS에 투자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차제에 금융당국이 서둘러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기존 금융사 판매망에서 독립된 독립투자자문사(IFA)의 설립이다. 한국 사회는 이미 저금리·저성장·고령화로 대변되는 반퇴시대로 접어들었다.

위험하다고 해서 투자상품을 외면할 순 없다. 그러나 자사 상품 판매가 지상과제인 기존 금융사에서 객관적 자문을 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믿고 의지할만한 재테크 도우미가 있어야 하는 이유다.

자문사에서 투자상품의 장단점과 위험성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들은 뒤 금융사를 찾아 상품을 구매하는 시스템, 금융판 ‘의약분업’ 시스템이 빨리 정착되길 기대해본다.

박진석 경제부문 기자kaila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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