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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정일, 처음엔 3대 세습 생각 안해 … 천황제 방식 고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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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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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26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오른쪽 넷째)이 후계자인 김정은(오른쪽 셋째), 장성택 당시 당 정치국 후보위원(왼쪽 셋째)과 함께 평안남도 회창군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묘를 둘러보고 있다. 이후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된 김정은은 2013년 12월 고모부인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을 처형했다. [중앙포토]

김정일(2011년 사망) 북한 국방위원장이 3대까지 권력을 세습할 생각이 당초엔 없었으며, 김일성(1994년 사망) 북한 주석은 자신이 죽은 뒤 후계자가 주체노선에서 이탈할 경우 권총으로 사살하라는 명령을 측근들에게 내렸다는 주장이 나왔다.

월간중앙, 라종일 교수 인터뷰
“김씨 가문 상징적 존재로 남아야”
김정일, 집단 지도체제 구상 비쳐
김일성은 측근 10명에게 권총 주며
“아들 주체노선 이탈 땐 사살” 명령
라 “개방 좇던 장성택 죽음 예정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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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정보원 해외·북한 담당 1차장과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라종일(75·사진) 한양대 국제학부 석좌교수는 조만간 발간될 『장성택의 길 : 신정(神政)의 불온한 경계인』(가제)이란 책에서 이같이 밝혔다.

 월간중앙이 입수한 이 책의 원고에 따르면 김정일 위원장은 후계구도와 관련해 주변에 “또 한 번의 세습에 의한 권력 승계는 없다. 김씨 가문은 앞으로 국가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담보하는 상징이고, 인민들의 충성의 대상으로만 남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발언을 한 시기는 특정되지 않았으나 김정일은 가장 믿을 만한 측근 열 명에게 “국가 운영은 오늘 여기에 온 당신들이 맡아라.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나라를 운영할 방안을 생각해 보라”며 이같이 강조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라 교수는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김정일로서도 고민이 많았을 것”이라며 “자기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준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것 같고, 그렇다고 특별히 다른 방법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라 교수는 “고민하다가 시간에 쫓기게 되고 3대 세습으로 가는 길 외에 다른 방도를 찾지 못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라 교수의 취재원들은 김정일이 “함께 생각해 보라”며 말한 권력 방식이 일본의 천황제에 가깝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이 마치 일본의 천황제와 유사한 제도를 고려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라 교수에게 “그게 될 말인가, 그런 일이 되겠나”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대목도 있다.

 라 교수의 책은 김정일·김정은 세습체제 이행 과정의 비사(秘史)를 담은, 일종의 증언록이다. 북한의 권력 이양, 국가 노선에 관한 북한 지도자들의 생각과 발언들이 등장하며 2인자의 삶을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장성택 전 북한 노동당 행정부장의 행적과 발언도 담겨 있다.

라 교수는 북한 내부 사정에 정통한 중국·일본·한국의 전문가 40여 명을 취재했다. 대부분 공·사적 인간관계를 통해 북한 권부의 기밀을 접할 수 있는 인물들이어서 익명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책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건강이 악화될 즈음 자신이 가장 믿는 측근 열 명을 은밀히 불러 모은다. 그러곤 이들에게 손잡이가 은(銀)으로 된 권총을 하나씩 나눠줬다.

김 주석은 자신이 죽은 뒤 후계자인 아들(김정일)이 자신의 노선에서 일탈해 함부로 체제 개혁에 손을 댈 경우 “누구라도 바로 이 총으로 그를 사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극단적인 조치를 지시한 것이다.

 김일성의 이 발언에 대해 라 교수는 “개혁·개방을 한다는 것은 결국 남한이 걸어간 길을 뒤늦게 따르는 셈”이라며 “반세기 가까운 체제 경쟁에서 패배를 자인할 수는 없었다는 의미”라고 풀이했다. 중국식 개혁·개방을 추구하다 끝내 죽임을 당한 장성택의 운명도 그런 측면에서 이미 예정돼 있었다고 이 책엔 써 있다.

 특히 80년대 중반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와 김일성 주석의 사위 장성택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경제가 파탄하지 않겠는가?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황장엽)

 “그런 일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장성택)

 “무슨 좋은 방책이라도 있는가?”(황)

 “우리 경제는 이미 파탄이 나 있는데 또 어떻게 파탄이 나겠습니까?”(장)

 북한은 80년대 말부터 90년대 후반까지 곡물 생산량이 급감, 배급제도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태를 예감한 황장엽이 김일성종합대학 제자인 장성택에게 위기감을 토로하자 장성택이 한 술 더 뜬 것이다.

박성현 기자 ps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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