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익산에 가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국보 11호 미륵사지 석탑이 있습니다.
이 미륵사지 석탑은 지난해 12월 16일 본격적인 복원에 들어가며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1998년부터 무려 17년간 해체하고 조사·연구하는 수순을 밟았죠.
해체하기 전 남아있던 6층까지 복원이 끝나는 건 2017년으로 예정돼 있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탑이기에 이토록 주목받는지 함께 알아볼까요.

복원에 들어가기 전 미륵사지 석탑의 모습. 일부가 무너져 내려 콘크리트로 덧씌웠다.
일제 때 콘크리트 떼고 우뚝 서는 미륵사지 석탑
삼국유사가 전하는 미륵사 창건 이야기
미륵사지 석탑은 전북 익산시 미륵사지에 있는 석탑입니다. 미륵사지는 미륵사란 절이 있던 땅이라는 뜻이죠. 미륵사는 601년(백제 무왕 2)에 지어졌다고 전해지며, 무왕과 선화공주 설화로 유명한 사찰입니다.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와 ‘서동요’ 노래로 결혼하게 된 서동의 이야기를 아시나요. 서동은 나중에 백제의 무왕이 됩니다. 무왕과 선화공주는 함께 용화산에 있는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고 있었죠. 이때 갑자기 연못에서 미륵삼존(미륵불과 좌우에 있는 보처불보살을 합한 명칭)이 나타났습니다. 이를 본 왕비가 왕에게 절을 세우자고 청했고 지명법사의 도움을 받아 연못을 메우고 금당(부처님을 모시는 불전)과 탑, 회랑(금당을 둘러싼 복도)을 세웠다고 삼국유사에 나오지요.
사찰 건물의 배치를 가람배치라고 하는데, 미륵사는 전형적인 백제 가람배치에서 벗어나 세 개의 탑과 세 개의 금당이 회랑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를 삼원병렬식 가람배치라고 하는데 미륵삼존을 모시기 위해 금당을 세 곳으로 했다고 해요. 서쪽에 현재 보수 중인 미륵사지 석탑(서탑)과 서원금당지, 가운데 목탑터와 중원금당지, 동쪽에 동탑과 동원 금당지가 있죠. 이러한 가람배치는 미륵사가 유일합니다. 이렇게 독특한 가람배치를 가지게 된 배경에는 미륵신앙이 있습니다.

미륵사지 석탑은 한쪽이 허물어진 형상을 유지하되 구조적 안정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복원될 예정이다.
미륵신앙은 이상적인 사회를 제시하는 미래의 부처인 미륵을 믿는 신앙입니다. 삼국통일
을 위한 전쟁 때문에 암울한 현실에 처한 백성들은 미륵신앙으로 구원받기를 바랐습니다.
지배층은 이상적인 왕이 다스리는 시기에 미륵불이 나타난다는 경전에 근거하여 자신이
곧 그 왕이라고 정당화하는 데 미륵신앙을 이용했고요.
우리나라 최고이자 최대 석탑
미륵사는 조선시대인 17세기 정도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서탑과 일부 석물만 남아있습니다. 가운데 목탑은 조선시대 이전에 이미 불에 타 없어졌고, 조선시대에 동탑도 붕괴됐습니다. 유일하게 남아있던 서탑 즉, 미륵사지 석탑은 현재 6층으로 높이가 14.24m나 됩니다. 5~6층 아파트와 비슷한 높이죠. 원래는 9층까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렇다면 지금보다도 훨씬 큰 탑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안타깝게도 남아있는 6층도 온전한 모습은 아닙니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석탑의 일부가 무너지면서 전체가 붕괴될 위험에 처하자 일본인들이 콘크리트를 덧씌워 보수했어요.
미륵사지 석탑은 고대 목탑의 구조와 양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당시 백제 건축기술의 수준을 볼 수 있고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것 중 최고(最古)이자 최대(最大)의 석탑으로 가치가 큽니다. 탑의 기초가 되는 돌은 아랫부분이 굵고 위로 갈수록 얇은 모양입니다. 1층에 세운 모서리 기둥은 위아래보다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 기법’이 적용됐죠. 또한 석재에 홈을 파서 끼워 맞추는 식으로 탑을 쌓았습니다. 이들은 목조건축 기법에서 온 것입니다.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덧씌운 콘크리트를 해체하는 모습. 무려 185t에 달하는 콘크리트를 떼내야 했다.
2009년에는 석탑에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를 담은 용기)’가 출토돼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발견으로 서탑의 건립 시기(639년) 및 미륵사 창건의 주체와 성격이 밝혀졌어요. 백제 ‘사택덕적의 딸’이 건립했다는 글씨가 남아 있었던 거죠. 백제 역사와 불교문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습니다.
복원 방법 논란과 잘못 복원된 동탑
미륵사지 석탑은 붕괴되지 않도록 일제강점기에 응급처치한 콘크리트도 금이 가면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1998년 미륵사지 석탑의 구조안전진단을 실시했고, 1999년 완전히 해체한 후 보수정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01년 10월 6층부터 해체하기 시작했습니다. 덧씌워져 있던 185t 가량의 콘크리트도 떼어냈습니다. 2010년 해체 작업을 마치고 연구와 조사를 거쳐 마침내 지난해 12월부터 본격적인 재조립에 돌입했습니다. 공사는 2017년 7월에 마무리 될 예정입니다.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와 금제사리봉안기를 통해 미륵사 창건과 석탑의 건립시기 등을 알 수 있게 됐다.
복원을 결정할 때까지 많은 전문가들의 논의가 있었습니다. 경사면이 있는 6층까지 보수
정비하자는 의견, 6층까지 완전히 복원하자는 의견, 9층까지 복원하자는 의견이 다양하게
논의됐습니다. 결국 남아 있던 모습 그대로 6층까지 보수하게 됐지요. 문화재청 산하 국립
문화재연구소는 미륵사지석탑의 역사적 고증의 한계와 학술적 근거의 부족으로 9층 복원이나 6층 완전 복원이 불가능하다고 밝혔습니다. 역사적인 고증 없이 추론에 의해 복원이 이루어질 경우 문화재로서 가치를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동탑이지요.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1910년 당시의 미륵사지 석탑. 콘크리트 보수가 이뤄지지 않은 이 모습대로 복원이 이뤄진다.
미륵사지에 가면 복원 작업 중인 미륵사지석탑의 오른쪽에 한눈에 봐도 새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탑이 하나 있습니다. 1993년에 복원된 동탑입니다. 동탑은 완전히 무너져 탑이 있었던 자리만 남은 상태였는데, 4년간의 공사를 거쳐 복원됐죠. 동탑의 복원은 미륵사지 석탑을 모델로 삼아서 진행됐습니다. 문제는 서탑과 동탑이 같은 모양이라는 근거가 어디에도 없다는 점입니다. 고증 확인 없이 9층으로 세우고 금속제 상륜부까지 올렸죠. 또한 서탑은 시간이 지나면서 중심축이 4도 정도 기울어 한쪽으로 기우뚱한 상태였는데, 이를 원형으로 착각해 작업했어요. 게다가 현장에서 발굴된 석재는 일부만 재사용하고 거의 모든 석재를 새로 구해다 써서 이질감이 들 정도로 깨끗합니다. 기계로 가공한 돌 때문인지 모조품같은 느낌도 들죠.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1910년 당시의 미륵사지 석탑. 콘크리트 보수가 이뤄지지 않은 이 모습대로 복원이 이뤄진다.
어떤 모습으로 복원되는가
오랜 세월을 견디다 보면 문화재가 훼손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특히 야외에 있다면 훼손
이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눈과 비, 바람에 직접적으로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훼손된 문화재는 다양한 방법으로 보수를 하게 됩니다. 이물질을 제거하고, 금이 간 부위를 접착시키죠. 그러나 미륵사지 석탑처럼 심각할 정도로 훼손된 석탑은 해체한 뒤에 다시 쌓아 올리며 복원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미륵사지 석탑은 처음 세워졌을 때 모습으로 복원되지 않습니다. 많은 고증과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미륵사지 석탑이 몇 층이었는지, 어떻게 지어졌는지 등 원형으로 복원할 만한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한쪽이 허물어져 있는 형상은 그대로 두고 구조적 안정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복원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발굴된 석재를 70%까지 재활용할 계획입니다. 콘크리트가 있던 자리에는 원래 석재와 성분이 가장 유사한 익산시 황동면의 화강암을 가져다쓴다고 합니다.

공중에서 내려다본 미륵사지 전경.
공사가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2017년 여름에는 미륵사지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복원된 동탑과 서탑이 나란히 서있을 것입니다. 김현용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미륵사지 석탑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된 중요한 문화재다. 문화재를 수리하고 복원할 때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문화재 복원에는 역사성과 진정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미륵사지 석탑을 계기로 역사성과 진정성 있는 문화재 복원 문화가 더욱 자리 잡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미륵사지 석탑은 2001년 해체 작업을 시작해 2010년완료했다. 해체 및 발굴을 마친 모습.
글=권민정 인턴기자 kwon.minjung@joongang.co.kr, 사진=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