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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간방·변소·구들장 … 잊혀진 단어를 불러내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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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호 32면

저자: 전남일 출판사: 돌베개 가격: 2만원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인기 덕분에 대한민국은 또 한 번 복고 열풍에 휩싸였다. 흔히 말하는 ‘쌍팔년도’적 노래와 패션, 광고까지 속속 소환되고 있다. 촌스럽지만 정겨웠던 과거를 잘 기억하고 있는 중년들의 대화에 드라마 속 대사와 시대적 배경이 등장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때 불쑥불쑥 머리를 스치는 단어들은 없는지. 실체도 단어도 희미해져서 동시대인이 아니면 요즘 젊은이들에게 설명조차 할 수 없는 것들…문간방, 변소, 구들방, 이런 단어들 말이다.


근대 이후 주거의 변화 및 현대 주거의 건축적·공간적·사회적 속성에 대해 연구해온 가톨릭대 전남일 교수(소비자주거학)는 ‘집’의 변천사를 통해 우리 삶의 발자취를 이야기한다. ‘근대’라는 큰 변혁을 넘어 아파트로 민족의 대이동이 일어난 현재까지 몇 세대에 걸쳐 달라진 집 안팎 공간과 풍경의 변천을 통해 우리의 삶과 가치관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관찰한 결과를 책으로 내놨다.


‘안방과 사랑방 vs. 부부 침실’ 편은 시대가 바뀌면서 가족의 역할과 주거 공간의 기능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생각해보면 전통적인 ‘안방’은 단지 잠만 자는 곳이 아니었다. 밥도 먹고 세면도 하고 ‘요강’을 이용해 용변도 봤다. 손님 초대, 아이들 교육까지 담당한 다목적 공간이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부모님이 주무시는 방’ 또는 젊은 세대의 ‘부부 침실’로 바뀌었다. 핵가족화로 가족 구성원들이 자신만의 방을 갖게 되고, 서양식 주거문화의 영향으로 응접실 또는 거실이 생기면서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공간으로 분리된 때문이다.


근대 이전 존재했던 남자들만의 공간 ‘사랑방’이 사라진 것도 가족 구성원 간의 역할 변화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남자들에게 집 안의 사적인 공간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부엌 vs. 주방’ 편은 여성의 노동공간이었던 부엌이 이제는 가장 활발한 가정 내 교류공간으로 탈바꿈한 과정을 짚었다. 전 교수는 “‘한솥밥을 먹는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면 부엌이 있어야만 비로소 집으로서 제 기능을 한다 말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과거 우리들 기억 속의 부엌은 방에서 나와 마루를 거쳐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번거롭고 고립된 장소였다. 우리 어머니들은 추운 겨울이면 연탄을 갈기 위해 외투를 입어야만 했다. 무거운 밥상을 들고 나르는 수고로움은 말할 것도 없다. 시대가 변화하면서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달라지고 이에 따라 가장 급격하게 변화한 것이 바로 ‘주방’이라는 이름으로 변신한 부엌이다.


전 교수는 또 ‘한옥 vs. 양옥’ ‘문간방 vs. 다세대주택’ ‘단칸방 vs. 고시원’ 등의 코너에서는 집 생김새의 변천사도 훑는다. 단독 주택과 아파트, 마을과 단지, 국민주택과 동호인주택의 비교를 통해서는 사는 곳이 바뀌면서 더불어 사는 풍경 또한 바뀌어 왔음을 이야기한다.


내 가족이 사는 하나의 공간 단위에서 옷을 갈아입고 쇼핑하듯 ‘상품’으로 전락한 집. 본래 온기 가득한 공간이어야 하지만 월급을 평생 쏟아 부어도 소유 여부가 불확실한, 그래서 인생의 목표가 된 집을 둘러싼 팍팍한 삶은 도대체 무엇에서 기인한 것일까.


구한말 이후부터 현재까지 주거문화에 대한 기록을 촘촘하게 엮은 책은 드라마처럼 말랑말랑하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롭다. 4년간 집필에 몰두하며 ‘읽기 쉬운 책’을 쓰려고 노력했던 전 교수는 급기야 책 전편에 들어간 삽화와 설계 도면을 직접 그렸다. 과거 ‘안방’ 하면 떠오르는, 엄마가 하루에도 서너 번씩 쓸고 닦은 자개장이 있던 그런 풍경 말이다.


펜으로 그린 일러스트 도면 역시 단순하다. 안방을 나와 마당을 거쳐야만 갈 수 있었던 으슥한 구석의 ‘변소’ 위치까지 생생하게 전달된다. 그 옛날 문간방에 살던 똘똘이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새삼 오래된 얼굴도 떠오른다. 무엇을 상상하며 읽느냐에 따라 재미가 달라지는 책이다.


글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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