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눈꽃 활짝 ‘은빛 화원’

중앙일보

입력 2016.01.15 00:03

업데이트 2016.01.18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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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면

l 소백산 설경

소백산에 눈이 내렸다. 땅에는 눈이 소복하게 쌓이고 나무에는 상고대가 촘촘하게 매달렸다. 제2연화봉 대피소에서 연화봉으로 오르는 길은 온통 하얘서 눈이 부셨다. 문자 그대로 설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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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설산만큼 강렬한 존재도 없다. 우리 땅에는 만년설이 없기 때문이다. 끝내 소멸하고 마는 운명을 사는 눈과 알몸뚱이로 모진 바람을 맞아야 하는 겨울 산은 서로가 너무 절실하다. 그래서 하얗게 얼어붙은 설산은 황홀하고 눈부시지만, 장엄하고 처연하다.

겨울 산의 표정은 눈과 바람이 빚는다. 산이 겨울잠을 자는 사이, 눈과 바람은 까마득한 정적 속에서 분주하게 상고대를 빚고 부지런히 눈꽃을 피운다. 하양이 능선을 덮고 나면 겨울 산은 저마다 한 폭의 그림으로 되살아난다. 험준한 산은 본디의 강렬함이 선명해지고 순한 산에선 더 없는 포근함이 배어난다. 꽃도 나무도 별 볼 일 없는 무명의 산마저 눈이 내리면 명산이 부럽지 않다.

올겨울에도week&은 설산에 올랐다. 눈 소식이 드물었지만 겨울 산은 어김없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뽀드득뽀드득 눈길을 밟고 칼바람 맞으며 산비탈을 올라 끝내 소백산의 설경을 담았다. 오랜만의 설경이 사무치게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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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첫날 소백산 제2연화봉 대피소에서 담은 설경. 하얀 눈이 겨울 산을 덮었고, 그 겨울 산을 하얀 구름이 또 덮었다. 눈과 구름의 사이가 사람의 자리였다. 산길을 따라 등산객이 하염없이 오르내렸다.

상고대 · 운무 어우러진 ‘하얀 수채화’ 시리도록 눈부시네

l 소백산 2박3일 눈꽃 트레킹

이맘때 week&은 대대로 하앴다. 지난겨울엔 제주도 한라산에서,이태 전엔 울릉도 성인봉에서 하얗게 파묻힌 설산을 현장 중계했다. 눈을 헤치며 놀아야 제대로 된 겨울 여행이라는 생각, 눈보다 강력한 겨울 풍경은 없다는 믿음은 올 겨울에도 변함이 없다. 이번 겨울에는 소백산(1439m)에서 눈 소식을 전한다. 전국이 눈 흉년이었던 터라 취재가 녹록지는 않았다. 소백산국립공원 제2연화봉 대피소에서 2박3일을 잠복한 끝에 눈을 만났다. 마침 새해 첫날 아침이었다.

소백산의 눈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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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상한 병꽃나무 가지마다 상고대가 다닥다닥 붙었다.

“전국적인 눈 소식입니다. 30일 오후 중부 서해안을 시작으로 차츰 전국으로 확대….”

새해를 목전에 둔 지난달 30일, 소백산으로 향했다. 3주 가까이 눈 소식이 끊겼던 소백산에도 눈 예보가 난 터였다. 충북 단양에 들어서자 멀리 소백산의 웅장한 모습이 드러났다. 하얗지는 않았다. 지난해 12월 3일 모든 탐방로가 통제될 만큼 눈이 많이 왔다는데, 소백산은 차라리 흙빛에 가까웠다. 소백산에 든다 해도 소복이 쌓인 눈을 밟을지, 딱딱히 언 땅을 밟을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닷새치 식량을 이고 산행을 시작했다. 죽령탐방지원센터를 들머리 삼아 연화봉(1383m)으로 이어지는 죽령 코스로 방향을 잡았다. 전진기지가 될 제2연화봉 대피소까지 5.2㎞ 거리였다.

죽령 코스는 등산객이 가장 많이 오르는 길이다. 소백산 탐방로는 대체로 순한 편인데, 그 중에서도 죽령 코스가 가장 쉽고 빠른 길로 통한다. 죽령 코스는 등산로라기보다는 산복도로에 가까웠다. 3∼4m 폭의 넓은 포장길이 연화봉까지 이어졌다. 경사가 완만하고, 딱히 한눈팔 만큼 운치 있는 길도 아니어서 2시간이면 거뜬히 오를 만했다. 그렇다고 영 만만한 건 아니었다. 콘크리트 땅을 내내 거슬러 올라야 하는 터라, 지루하기도 하거니와 발바닥과 무릎이 고단했다.

제2연화봉(1357m) 정상의 대피소에 도착하고 나서야 백두대간 소백산에 들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저 멀리 월악산 영봉(1095m)부터 가까운 비로봉(1439m)까지 시야가 확 열렸다. 한반도 동쪽 해안선을 따라 요동치며 흐르는 백두대간은 태백산(1566m)과 소백산을 지나 남서쪽 내륙으로 방향을 튼다. 뾰족한 암봉이 빽빽이 솟은 설악산(1708m)의 능선이 공룡의 등뼈라면 소백산의 능선은 잔잔한 파도였다. 저 혼자 잘났다고 도드라진 것 없이 두루두루 산세가 고왔다. 산의 지붕에 선 것이 아니라 산의 품 안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산 중턱에 흰 구름이 드리워져 더없이 포근했다. 단지 눈만 없을 뿐이었다.

“상고대가 있는데 뭐가 문제요.”

소백산 국립공원 박노준 죽령분소장이 눈 걱정은 접어두라고 했다. 사실 겨울 소백산을 오른 이유 중 하나가 상고대였다. 대기의 습기가 나뭇가지에 달라붙어 눈꽃처럼 어는 현상을 상고대라 한다. 소백산은 겨울이면 정상 주변에서 상고대가 흔히 나타난다. 눈이 없어도 은빛 장관이 연출된다는 뜻이다. 박 분소장은 동틀 무렵부터 오전 11시까지가 상고대를 보기에 좋은 시간이라고 일러줬다. 해가 중천에 뜨면 상고대가 녹아내린다.

31일 새벽 드디어 눈이 내렸다. 그러나 날이 너무 흐렸다. 대피소 주변에 새우꼬리 모양의 상고대가 다닥다닥 붙었지만 안개 때문에 먼 풍경은 아예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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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6일 문을 연 제2연화봉 대피소. 7층 높이의 전망타워도 갖췄다.

꼼짝없이 대피소에서 발이 묶였다. 제2연화봉 대피소는 지난달 16일 문을 열었다. 소백산 국립공원에 들어선 최초의 대피소다. 제2연화봉 대피소가 문을 열면서 소백산 산마루에서 밤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 전에는 어떻게든 하루 안에 산행을 끝내야 했다. 소백산에 든 두 번째 이유였다.

날씨는 잔뜩 흐렸지만 대피소는 등산객으로 북적였다. 정원 125명의 대피소가 만원을 이뤘다. 취사장에서는 등산객의 조촐한 송년파티가 이어졌다.

은빛 설국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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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봉과 비로봉 사이의 산길이 온통 하얗다.

1월 1일 새벽, 유리창 밖으로 산등성이가 얼비쳤다. 안개가 걷히면서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라면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부리나케 짐을 챙겨 나왔다. 사위는 아직 어둑했으나 소백산의 웅장한 등줄기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비로봉 정상에서 새해 첫 일출을 맞으려는 등산객의 분주한 몸놀림이 능선을 따라 반딧불이처럼 반짝거렸다.

소백산은 봉우리가 한줄기로 이어져 있어 각 봉우리의 전망이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로봉에서는 연화봉이, 연화봉에서는 비로봉이 역할을 바꿔 피사체가 되어줄 따름이다. 서두를 것 없이 대피소 주변에 남아 해를 기다렸다. 산 너머로 한참 붉은빛이 돌더니 오전 7시40분 병신년(丙申年) 첫 일출이 시작됐다. 해가 떠오르자 소백산의 거대한 몸뚱어리가 드러났다. 영하 10도를 가리키는 기온 때문에 산 전체가 어제 내린 눈을 고이 머금고 있었다. 상고대도 풍년이어서 사방이 눈부신 하양이었다.

대피소 주변은 전망대로도 손색이 없었다. 연화봉과 천문대, 나아가 비로봉까지 한눈에 보였다. 한겨울 칼바람은 연방 하얀 운무를 몰고 다녔다. 가느다란 구름이 연화봉 능선을 유려한 몸짓으로 타고 넘어갔다. 구름바다 위로 희끗희끗한 머리를 내민 설산의 운치도 대단했다. 1월 1일의 소백산은 은빛 장관, 설국 그 자체였다.

신발끈을 고쳐 매고 아이젠과 스패츠를 채웠다. 대피소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연화봉을 향해 걸었다. 두툼한 등산화를 신었는데도 ‘뽀드득뽀드득’ 눈의 촉감이 전해졌다. 연화봉으로 가는 탐방로는 좌우로 신갈나무·철쭉나무·미역줄나무 등이 촘촘히 도열해 있었다. 머리 위로 구름이 쉴새없이 지나갔는데, 길은 바람 하나 없이 차분했다. 나무마다 흰 장식을 뒤집어 쓴 꼴이 크리스마스 트리 같았다. 나뭇가지마다 만발한 눈꽃이 해를 마주보고 맑은 빛을 뿜었다.

연화봉 정상의 소백산 천문대를 지나 완만한 오르막 길을 오르고 나니 산등성이를 사이로 길이 갈라졌다. 봄마다 연분홍 빛으로 물드는 철쭉 언덕이었다. 오른쪽 길은 능선을 바로 오르고 왼쪽 길은 능선의 허리를 가로지르는데 결국에는 하나로 이어졌다. 오른쪽 비탈길에서는 은빛 철쭉 동산을 내려다보는 전망이, 왼쪽 길은 눈꽃 상고대 매달린 나무 틈에 파묻히는 기분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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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연화봉과 비로봉 사이의 골짜기에는 여느 자리보다 눈이 수북했다. 두 고봉 사이에 끼어 햇빛을 덜 받았기 때문이다. 후미진 숲을 빠져나오자 날씨가 다시 오락가락했다. 장대한 비로봉이 안개에 가려 숨었다 나타나길 반복했다. 눈 앞이 흐려 가파른 나무 계단이 꼭 하늘로 이어진 길처럼 느껴졌다. 정상에 서니 구름 위에 뜬 기분이었다.

어느덧 해가 중천이었다. 하늘이 잠깐 맑은 틈을 타 소백산의 장엄한 산세가 구름 위로 떠올랐다. 올라오는 길에서는 비로봉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국망봉(1420m)과 신선봉(1389m)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비로봉은 소백산의 최고봉이자 정중앙이다. 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의 경계여서 정상석도 두 개가 있었다.

정상에서 어리곡 방향으로 내려왔다. 바람이 드세 눈 구경이 쉽지 않았던 비로봉과 달리 어리곡 코스는 차분한 눈 세상이었다. 죽죽 뻗은 낙엽송과 전나무가 우거진 숲을 걸었다. 눈 깔린 흙길이 많아 발도 편했다. 허기가 져 사과를 꺼내는데 나뭇가지에서 눈덩이가 우두둑 떨어졌다. 사과를 눈에 쓱쓱 닦아 크게 한입 깨물었다. 달고 차가운 겨울의 맛이었다.

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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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이 걸은 길

소백산 등산 코스는 다양하다. 탐방센터가 자리한 죽령·희방사·어의곡·천동·삼가동 아무 곳이나 들머리로 삼을 수 있다. 어느 곳을 선택하든 정상 비로봉을 올랐다가 내려오려면 족히 6시간 이상은 필요하다. 겨울에는 시간이 더 걸린다.

이 선택한 죽령∼연화봉∼비로봉∼어의곡 코스는 16.6㎞ 거리다. 7시간 이상 산행을 해야 하므로 물과 간식을 충분히 챙겨야 한다. 겨울 산행에는 방한복·스패츠·아이젠 등 장비가 꼭 필요하다. 제2연화봉에 대피소가 마련돼 1박2일 소백산 산행이 가능해졌다. 국립공원 홈페이지(reservation.knps.or.kr)에서만 예약할 수 있다. 1박 독립형 1만원, 일반형 7000원. 눈이 많이 내리면 입산이 통제될 수 있으므로 미리 확인하고 가야 한다. 소백산 북부사무소 043-423-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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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백종현 기자 jam1979@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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