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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살 때 담을 통 가져가 쓰레기 없는 삶, 이지혜…옥상텃밭서 상추 재배, 장터 공동체 연 이보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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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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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혜씨가 ‘NO WASTE’ 모임 회원들과 물물교환한 물건을 주고받고 있다. 이씨는 이날 가져온 퍼즐을 스탠드로 교환했다. [사진 전민규 기자]

“저 프라이팬 뚜껑을 갖고 싶은데, 우리 집 프라이팬 크기가 어땠더라….”

[연중기획 매력시민] 세상을 바꾸는 컬처디자이너

 지난 9일 오후 서울 아현동의 한 카페. 물물교환 모임에 나온 한 명이 우물쭈물하자 이지혜(28)씨가 딱 잘랐다. “좀 더 생각해 봐요. 정말 필요한 게 아니면 또 쓰레기가 되니까요.” 결국 프라이팬 뚜껑은 “내 프라이팬 지름이 뚜껑과 똑같은 28㎝”라며 자신 있게 손을 든 다른 회원의 차지가 됐다.

이날 모임엔 쓰레기 발생을 최소화하며 도심 속 자연을 실천하는 ‘노 웨이스트(NO WASTE)’ 실천가 6명이 참석했다. 모임은 블로그와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NO WASTE’ 실천 노하우를 공개해 온 이씨가 주선했다. ‘내추럴 시티즌’을 추구하는 이들의 가정엔 ‘물건감옥’과 ‘지렁이집’이 있다.

 이씨의 방 한편에 있는 ‘물건감옥’에는 매일 사용하는 옷·식기류 등을 제외하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는(탈옥시키는) 물품이 들어 있다. 두 달 이상 ‘탈옥’하지 못한 물건은 다른 ‘NO WASTE’ 실천가들과의 모임에서 물물교환 한다.

“모임의 유일한 규칙은 가장 절박한 이의 사연을 듣고 다수결로 주인을 선택하는 겁니다. 물건이 꼭 필요한 주인을 찾고, 순간적 욕심으로 가져간 물건이 또다시 쓰레기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죠.”

 이씨의 화장실 안쪽에는 그의 동거자인 지렁이 30마리가 산다. 가로 40㎝, 세로 30㎝ 크기의 ‘지렁이집’ 안 황토색 흙을 헤집으면 지렁이들이 꿈틀거린다. 이씨의 잔반 처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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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다 남은 음식을 양쪽에 묻어 주면 가운데서 잠자고 있던 지렁이들의 밥이 됩니다. 지렁이와 동거하며 음식물 쓰레기가 없어졌죠.” 너무 많은 양을 지렁이에게 주면 지렁이가 모두 소화할 수 없다. 자연스레 먹을 만큼만 조리하는 효과도 생겼다.

 시장 갈 때 각종 용기(容器)를 들고 가는 것도 이씨만의 ‘NO WASTE’ 방법이다. 두부와 채소, 고춧가루 등 각각의 용기가 따로 있다. 이씨는 “텀블러에 커피 담듯 식료품 용기를 따로 쓰면 버리기 일쑤인 비닐 봉지를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평범한 직장인 이씨가 ‘NO WASTE’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중학생 때부터. 어느 날 라면을 먹고 설거지를 하는데 냄비 크기만큼 부풀어 오르는 세제 거품을 보고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이후 대학에 진학해선 업사이클링에 흥미를 갖고 관련 동아리 활동을 하며 ‘NO WASTE’ 운동을 구상했다. 지난해부터 이씨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 (SNS)에서 ‘지렁이집’ 만들기, 잔반이 적게 나오는 조리법 등 ‘NO WASTE’ 실천과 관련된 모든 과정을 상세히 올리고 있다.

 “‘NO WASTE’에 참석했던 회원들이 따로 독립해 다른 지역의 모임을 주선하기도 합니다.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10명에서 100명, 1000명으로 늘어나면 지속 가능한 지구를 만드는 데 기여하게 되지 않을까요?” 이씨는 또 “쓰레기를 줄일 수 있고 물건을 아끼는 습관도 생겨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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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산동의 도심 텃밭에서 계절 채소를 들고 있는 이보은씨. 재배한 농산물들은 도심장터 마르쉐에서 판매된다. [사진 전민규 기자]

 매월 둘째 주 일요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엔 또 다른 방식으로 도심 속에서 자연친화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인다. 사과와 배, 파프리카, 양배추 같은 농산물들이 거래되는 도시장터 ‘마르쉐’가 열리는 것이다.

서울 홍익대 인근 빌딩숲의 옥상텃밭에서 자란 깻잎부터 10여 년간 대기업에 다니던 직장인이 회사를 그만두고 강원도로 내려가 키워낸 방울토마토까지, 여기에서 거래되는 농산물들엔 저마다 스토리가 있다.

 이보은(48) 마르쉐 대표는 이곳 장터에 나오는 농부들을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소개했다. 도심 속 옥상이나 공동체 텃밭에서 농산물을 키우는 도시농부,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농사를 시작한 귀농자, 그리고 부모들이 재배한 농산물을 과일잼이나 건조과일 등으로 가공·판매하는 20·30대 청년농부들이다.

이 대표는 “마르쉐에서 농부들은 복잡한 유통망을 거치지 않고도 좋은 가격에 물건을 판매할 수 있고, 소비자들은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친환경 먹거리’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마땅한 판매처를 찾지 못하는 도시농부들에게 마르쉐는 맞춤 장터다.

 그러나 마르쉐의 진짜 매력은 단순히 좋은 상품을 사고파는 것만이 아니라 바쁜 도시 생활에서 잊고 살았던 ‘인간관계’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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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서 깻잎을 키운 노하우, 토마토잼을 만드는 법 등을 이야기하다 보면 모두 친구가 됩니다. 농작물뿐만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스토리까지 사고파는 것이죠.” 이 대표는 “팍팍하고 무미건조한 게 도시의 삶인데 마르쉐에 오는 농부와 소비자는 시장을 마치 축제처럼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 마르쉐의 장터 풍경은 흔히 접하는 시장과 사뭇 다르다. 생산자는 비싸게, 소비자는 싸게 매매하는 보통 시장과 달리 농부와 소비자 사이에서 다양한 대화가 오간다.

소비자로 왔다 옥상텃밭에 꽂혀 도시농부가 되기도 하고, 은퇴 후 귀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친구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마르쉐 참가자들은 스스로를 ‘지산지소(地産地消·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해당 지역에서 소비한다)’를 넘어 ‘우산우소(友産友消·친구가 생산한 농산물을 내가 직접 소비한다)’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2012년 시작한 마르쉐는 현재 매월 4000여 명이 참여하는 축제가 됐다. 다품종 소량생산을 하는 농부들이 300여 품목의 농산물을 판매한다. 이

대표는 “마르쉐는 프랑스어로 장터라는 뜻인데 어원을 찾아보면 인간과 인간의 관계라는 뜻이 숨어 있다. 자연의 속도가 아닌 도시의 속도로 살며 인간 관계를 회복하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특히 도심 속 옥상텃밭에 큰 관심을 갖는다. 마르쉐 역시 2011년 서울 문래동의 한 건물 옥상에 조성한 텃밭의 수확물을 판매할 장소를 찾다가 만들어졌다.

당시 그는 지인들과 텃밭에 상추와 깻잎, 고추 등을 심었고 1년간 구슬땀을 흘려 농작물을 키웠다. 수확하던 날 동네 사람들을 모두 모아 파티를 열었다.

이 대표는 “콘크리트 더미 위에 마련된 작은 텃밭이 공동체를 묶어 주는 끈끈한 역할을 했다. 도시농부들이 자신의 농작물과 스토리를 펼쳐 놓을 수 있는 장이 필요해 마르쉐가 탄생했다”고 말했다.

 그의 남은 목표는 수도권 곳곳에 마르쉐 같은 ‘도심형 장터’를 만들어 확산하는 것이다. “이웃끼리 직접 키운 재료로 요리하고 다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다면 저절로 저녁이 있는 삶이 이뤄지지 않을까요? 패스트푸드나 대형마트보다는 불편하고 느린 삶을 살겠지만 행복은 더욱 클 겁니다.”

윤석만·정진우·김나한 기자 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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