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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녹색당의 거침없는 하이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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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권석천
권석천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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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 논설위원

이젠 익숙한 무력감이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한·일 위안부 합의로 요동쳤던 한국 사회가 이번엔 북핵에 출렁이고 있다. 지난 주말을 더 착잡하게 한 건 박형철 검사의 사표 제출이었다. 잘나가던 공안 검사였던 그는 국정원 댓글 사건 특별수사팀 부팀장을 맡았다가 두 차례 좌천성 인사를 당했다. 동료 시신 수습하려고 히말라야도 오르는데, 유능한 검사 하나 품고 가지 못하는 게 ‘검사동일체’ 원칙이었다.

 지난 토요일 저녁 서울 홍대입구역 부근 가톨릭청년회관에 들어섰다. ‘숨통이 트인다. 녹색 당신의 한 수’. 4월 총선에 출마하는 녹색당 비례대표 후보 5명이 쓴 책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1번 황윤(43), 3번 김주온(25), 5번 신지예(26) 후보가 단상에 올랐다. 이들 여성 3인의 직업은 다큐 감독, 대학원생, 청년단체 대표였다.

 “이번 총선에서 한 석이 확보되면 1번 후보가 2년 일한 뒤 사퇴하고 2번 후보가 나머지 2년을 일하게 됩니다. 다른 후보들은 비서관이나 기사로 일하고요. 두 석이 확보되면 역시 2년씩….”

 무슨 얘기지? 그들은 “우린 팀(team)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녹색당이 대의원을 선거 대신 추첨으로 뽑는 것도 인물보다 팀이 중요해서다. ‘저는 사람에게 실망하지 않습니다’. 만화 ‘송곳’의 대사는 매번 메시아를 갈망하면서도 매번 실패해 온 한국 정치에 그대로 적용된다. 나는 김무성, 문재인, 안철수보다 그들의 팀이 더 궁금하다.

 후보들은 한마디씩 포부를 밝혔다. “가장 약자인 동물에 대한 배려가 당연시될 때 사람도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동물권을 헌법에 명시하겠습니다.”(황 후보) “월 기본소득 40만원 보장은 우리의 삶을 전환하는 계기가 될 겁니다. 기본소득이 상식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김 후보) “우리에겐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 얻고 좋은 집에 사는 한 가지 루트밖에 없습니다. 보다 다양한 삶의 노선들을 만들어야 합니다.”(신 후보)

 2부엔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임순례 감독과 김탁환 작가가 등장했다. 녹색당 당원인 두 사람은 책을 펴들고 각각 황 후보, 신 후보의 글귀를 낭독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동물 학대를 보며 제가 더욱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생명의 존엄성 유린에 대한 사회 전체의 무뎌짐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살처분과 방역을 낯익은 풍경으로 보고 있습니다.”(황 후보) “저를 비롯한 몇몇 청년이 부흥주택의 주민이 된 것은 작년부터입니다… 함께 나눌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는 과정을 통해 분리된 나만의 집에서 살지 않아도 될 방법을 찾으려 했습니다.”(신 후보)

 후보들에게 질문 쪽지들이 전달됐다. ‘친구가 계속 자살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살아도 미래가 안 보인다는데…’. “요즘 청년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남을 돌보지 마라. 그러면 너도, 남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건데요. 그럴수록 서로를 돌봐야 합니다. 함께 답을 찾아야 합니다.”

 녹색당은 2012년 총선에서 0.48%, 2014년 지방선거에서 0.84%를 득표했다. 이번 총선에서 정당득표율 3%를 얻어야 국회에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다. 과연 현실의 벽을 넘어설 수 있을까. 이날 “탈(脫)핵, 탈송전탑을 상징하는 탈을 쓰고 유세하자” “동물 발자국 투표도장을 만들어 캠페인을 벌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걸그룹) 혜리의 알바당과 합당하자”는 말에 웃음이 터졌다.

 분명한 건 “권력정치가 아닌 삶의 정치”를 외치는 이들의 도전이 무의미하지만은 않을 것이란 사실이다. 어느덧 한국 정치가 잃어버린 ‘가치 논쟁’의 필요성을 확인시켜줄 것이란 사실이다. 이날 나의 무력감을 걷어낸 것은 신지예 후보가 전한 우화 한 토막이었다.

 밀림에 큰불이 나서 동물들이 달아나는 데 벌새 한 마리가 불을 끄려고 물을 머금고 오갔습니다. 코끼리가 물었답니다. 그 정도 물로 불을 끌 수 있겠어? 벌새가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야. 벌새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한국 사회를 바꿔나갈 때입니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