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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존엄사법 통과 후 과제는

중앙일보

입력

노숙자·행려환자 등이 큰 병에 걸리면 국립중앙의료원을 비롯한 공공의료기관에 입원한다. 중증이 되면 중환자실로 옮긴다. 상당수는 인공호흡기와 혈액 투석 등 연명의료를 받다 숨진다.

2018년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일명 존엄사법)’이 시행돼도 이런 상황은 달라지지 않게 됐다. 본인이 “연명의료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을 미리 문서로 남기지 않는 한 연명의료를 중단하기 힘들어진다.

지난 8일 존엄사법이 19년 만에 국회를 통과했는데도 불구하고 가족이 없는 노숙자나 행려환자는 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게 됐다. 존엄사법에서 가족이 없는 무연고자에 대해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는 근거 조항이 삭제돼서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만든 존엄사법에는 (연명의료 중단 여부에 대한) 환자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 병원 윤리위원회가 결정할 수 있게 돼 있었다. 윤리위원 3분의 2 출석과 출석위원 전원 찬성으로 연명의료 중단을 의결하게 했다. 2013년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권고안을 바탕으로 한 조항이다. 국가생명윤리위는 의료계·종교계·윤리학·법조계와 시민단체 등이 참여하는 사회적 합의기구다.

하지만 이 조항은 지난해 12월 하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문위원실 심의 과정에서 삭제됐다. 병원 윤리위원회 구성이나 의결 요건이 불명확해 무연고자 생명권 침해 소지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해당 병원에 근무하지 않은 사람과 종교계·법조계·시민단체 등의 추천을 받은 사람이 윤리위원회에 참여하게 돼 있지만 병원 측에서 자신들이 임의로 움직일 수 있는 인사로 채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지방자치단체 공무원 등이 포함돼야 병원의 악용 소지를 차단할 수 있다고 봤다. 법사위에서는 “법안 통과가 급하니 우선 ‘문제 조항’을 삭제하되 추후 보완해서 법률을 개정할 것”을 권고했다.

의료계는 입장이 좀 다르다. 고윤석 서울아산병원 중환자실장(호흡기내과 교수)은 “연명의료 중단 결정은 시급을 다투는 일인데, 병원윤리위원회 회의에 외부 인사가 반드시 참여해야 하고 그 사람이 반대하지 않아야 무연고자의 연명의료 행위를 중단할 수 있게 됐다”며 “이는 합리적 결정을 저해해 무연고자에게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지속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 실장은 “외부인사가 참여하되 ‘위원 3분의 2 출석, 출석자의 3분의 2 찬성’으로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권용진 국립중앙의료원 기획실장도 “가족이 없는 취약계층 환자의 경우 연명의료를 지속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통령 복지부 생명윤리정책과장은 “법사위에서 아예 삭제하라는 게 아니라 보완을 요청한 만큼 2018년 법률 시행 전에 개정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법사위에서 연명의료 중단 결정을 대리하는 가족의 연령을 만 17세에서 19세로 올린 점도 논란거리다. 종전의 수 많은 토론회와 보건복지위원회 논의를 거쳤는데 법사위에서 갑자기 올린 게 타당하느냐는 지적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양식 통일도 시급해졌다. 현재 민간 차원에서 두세 가지 양식이 이미 쓰이고 있고 대형병원도 서로 다른 양식을 사용하고 있다. 허대석 서울대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미국은 주별로 통일된 양식을 사용한다. 우리도 통일하는 게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이하 사실모)’ 등 민간 비영리법인을 통해 이미 작성해 놓은 의향서 13만 건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관심사다. 실제로 법률 통과 후 의향서 작성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

노연홍 사실모 대표회장(가천대 메디컬캠퍼스 부총장)은 “법률 시행 전이라도 정부가 이른 시일 내에 사전연명의료의향서 표준 양식을 제시해야 혼란을 줄일 수 있다”며 “민간에서 이미 작성한 사람의 경우 민간단체를 통해 새 양식으로 전환하면 효력을 인정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신성식 복지전문기자ss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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