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시진핑도 못 건드리는 김정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기사 이미지

이철호
논설실장

지난해 12월 12일 북한판 걸그룹 모란봉악단의 철수 때 일이다. 한·미 정보당국이 TV 영상에서 가장 눈여겨본 대목은 베이징 호텔 숙소까지 찾아가 현장에서 귀국을 만류하던 인물이었다. 바로 중국 공산당 전 대외연락부장 왕자루이와 현 대외연락부장 쑹타오다.

 중국은 시진핑 주석(이하 경칭 생략)과 리커창이 외교를 나눠 맡는다. 국가 운명에 관계된 대미·대러·대북한 외교는 시진핑이 직접 관리한다.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은 내각(총리-외교부장)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시진핑 공산당 총서기에게 보고한다. 따라서 모란봉악단의 귀국 만류는 시진핑의 육성(肉聲)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김정은은 “현지 판단을 믿는다”며 철수시켰다. 그리고 사흘 뒤(12월 15일) 핵실험을 지시했고, 지난 3일 최종 재가했다. 시진핑도 못 말리는 김정은이다.

 북한 4차 핵실험 이후 온통 신경은 단둥~신의주 지하의 ‘조·중우호송유관(送油管)’에 쏠리고 있다. 북한 석유 수요의 90%가 지나는 생명줄이다. 이 송유관은 희한하게 북한 핵실험 때마다 ‘기술적 문제’가 생겼다. 중국은 ‘내부 수리 중’ 팻말을 걸고 두어 달간 원유 찌꺼기가 굳지 않을 정도로 파이프를 걸어 잠궜다. 북한은 그때마다 군소리 없이 6자회담에 끌려 나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송유관에 기술적 문제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더 분명한 것은 시진핑이 슬그머니 파이프를 다시 틀 것이란 사실이다. 왜일까?

 중국의 최고 목표는 공산당 일당독재 유지다. 중국은 14개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지만, 모두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한참 아래다. 유독 신경을 곤두세우는 게 한반도다. 중국은 “북한이 붕괴되면 대량 난민이 유입된다”는 게 공식 입장이다. 하지만 속마음은 다르다. 우선 북한의 붕괴로 미군의 존재가 압록강까지 어른거리는 것 자체가 중국엔 악몽이다. 또 통일한국은 1인당 소득 3만 달러의 자본주의 국가다. 민주주의도 잘 작동하는 편이다. 중국은 이런 새 이웃의 전염력을 겁낼 수밖에 없다. 동북3성엔 200만 명의 조선족도 살고 있다.

 김정은은 영리하다. 자신의 지정학적 가치를 안다. 중국이 자신을 함부로 못하리라 믿고 마구 핵·미사일을 쏴댄다. 내심 중국도 북핵을 꽃놀이패로 즐기는 분위기다. “북한을 혼내 달라”고 매달릴수록 중국의 국제적 몸값이 오르기 때문이다. 이런 중국을 한국이 움직이기란 쉽지 않다. 박근혜가 아무리 ‘천안문 망루’ 외교를 펼쳐도 안 되는 일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 정치지도자들에게 북핵은 정치·외교적 투자가치를 전혀 못 느끼는 사안이다. 잠시 지나갈 잠재적 위협일 뿐 유권자의 표가 안 된다. 미국이 이번에도 “수소폭탄은 아니다”며 애써 깎아내리는 이유다.

 김정은의 핵 장난은 이어질 것이다. “핵·미사일을 발전시켜 핵 보유국으로 인정받으라”는 게 김정일의 10·8 유훈이다. 하지만 북한에도 ‘노동당보다 장마당이 더 세다”는 말이 있다. 원유·쌀·금융이 막히면 북한은 생존하기 어렵다. 여전히 북한의 운명은 미·중이 쥐고 있는 셈이다. 미국이 적극적인 자세로 돌아서려면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하나는 북한 핵미사일이 미 본토 상공을 지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북한이 이슬람국가(IS)나 알카에다 등 테러집단에 핵 물질을 넘기는 경우다. 미 유권자들이 피부로 위기를 느껴야 미 정치권이 목숨 걸고 움직인다.

 의외로 중요한 변수는 국제여론이다. 중국은 1989년 고르바초프를 따라온 외신기자들에 의해 끔찍한 천안문 유혈진압 장면이 공개되면서 궁지에 몰렸다. 심각한 경제제재 속에서 중국은 한국을 유일한 탈출구로 삼았다. 그렇게 이뤄진 게 92년 한·중 수교였다. 올해 중국 경제 상황이 나쁘다. 성장률은 떨어지고 외환·주식시장은 쑥대밭이다. 만약 중국 경제가 곤두박질하고, 북핵 비난여론이 국제적으로 걷잡을 수 없게 되면 중국도 다른 선택지가 없다. 한·미의 요구대로 대북 송유관을 완전히 걸어 잠글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소극적이고 시진핑은 김정은을 건드릴 생각이 없다. 안타깝고 분하지만, 섣부른 기대는 무리다. 북한 1~3차 핵실험 때도 항상 그랬다.

이철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