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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천재들이 뭉치자 세상이 달라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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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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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베이터
월터 아이작슨 지음
정영목·신지영 옮김
오픈하우스, 748쪽, 2만5000원

디지털 혁명을 이뤄낸 주역은
나홀로 연구자 아닌 협업 인재들
『스티브 잡스』로 충격파 던진 작가
10가지 혁신 과정 전방위로 파헤쳐

정치 분야에서는 혁신이나 혁명이라는 용어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도 많다. 과학기술과 경제의 영역에서는 누구나 혁신·혁명의 절박성을 인지한다. 절박성에도 불구하고 로드맵이 선명하게 안 보인다. 한가지 방법은 혁신의 실제 역사를 살피는 것이다. 『이노베이터(The Innovators·혁신가들)』는 1830년대에서 오늘에 이르는 혁신 과정을 60여건의 인물·협업 사례로 다룬다.

우리말 부제 제목은 ‘창의적인 삶으로 나아간 천재들의 비밀’이다. 영문 부제는 ‘해커·천재·괴짜로 구성된 그룹은 어떻게 디지털 혁명을 만들었는가(How a Group of Hackers, Geniuses, and Geeks Created the Digital Revolution)’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이다. ‘컴퓨터·인터넷의 부모들’이라는 제목을 붙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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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의 공동 창업자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1976년). [사진 오픈하우스]

저자는 독서계를 강타한 초특급 베스트셀러 『스티브 잡스』(2011)의 작가다. 『스티브 잡스』는 ‘발간되자마자 고전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책 또한 모든 명품 매체의 주목을 받았다. 2차 자료를 광범위하게 인용하며 흥미로운 혁신의 핵심을 추려냈고 인터뷰를 통해 신선함을 더했다.

이 책은 균형이 잘 잡혔다. 혁신 영웅을 중시하지만 영웅사관에 함몰된 것은 아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익명에 가까운 ‘작은 영웅들’도 소개한다. 그들은 에고가 강한 사람들이다. 고집불통이다. 디테일에 집착하며 사생활이 없을 정도로 작업에 몰두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꿈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혁신가들은 ‘나 홀로’ 골방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저자는 창조가 협업의 긴장감 속에서 실현된다는 것을 드러낸다. 혁신에 필요한 천재성·실용성·사업능력을 모두 갖춘 사람은 없다. 협업 없는 혁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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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컴퓨터의 첫 번째 제품인 ‘애플 I’. [사진 오픈하우스]

혁신가들은 ‘가능성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가능성을 알아 보느냐, 못 알아보느냐에 따라 천문학적인 이득과 손실이 왔다 갔다 했다. 이들은 또 예술·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결합을 고민한 사람들이었다. 저자는 앞으로의 혁신이 ‘미디어, 패션, 음악, 엔터테인먼트, 교육, 문학, 예술’과 기술을 결합시키는 새로운 방법에 달렸다고 주장한다.

또 저자는 역사에 내재한 “불가피한 논리(inevitable logic)”도 중시한다. 문제해결은 항상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정보시대의 역사는 문제해결의 역사였다. ‘제3차 산업혁명’이라고도 불리는 ‘디지털 혁명’은 17세기 과학혁명에 비하면 이전·이후의 단절 정도가 덜하다. 새로운 돌파구의 등장에 의한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 못지않게 누적적 발전이 중요했다.

이 책은 대체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따라 컴퓨터, 프로그래밍, 트랜지스터, 마이크로칩, 비디오 게임, 인터넷, 개인용 컴퓨터, 소프트웨어, 온라인, 웹 등 디지털 시대 10대 혁신의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과학에 이어 군(軍), 경영의 역할이 순차적으로 추가된다. 지역적으로는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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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연구소의 존 바딘과 윌리엄 쇼클리, 월터 브래튼(1948년). [사진 오픈하우스]

이 책이 던지는 생각할 거리는 무엇일까. 우선 과학기술 혁신이 앞으로 미칠 영향이다. 지금까지는 인류에게 이로웠다. 인류와 조화를 이뤘다. 앞으로는 모른다. ‘창조적 파괴’의 주역들은 일거리를 없애는 사람들, 실업의 원흉, 청년 일자리를 없애는 ‘살인자’다. 디지털 혁명은 소수에게는 엄청난 부를, 다수에게는 엄청난 권력을 안겨줬다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저자는 낙관적이다. 저자는 컴퓨터와 인터넷이 인류의 현실 체험을 증강했다(augmented)고 본다. 또 앞으로도 디지털 도구들은 인간을 대체하거나 위협하는 게 아니라 돕는 역할을 계속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우리나라에 던지는 문제는 뭘까. 저자는 인물뿐만 아니라 실리콘밸리 같은 생태계를 중시한다. 실리콘밸리는 스탠퍼드대,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와 기업들 간에 산학협동이 잘 이뤄지고 있다. 저자는 냉전기의 군산복합체의 역할에도 주목한다. 우리에게도 산학협동이 있고 군산복합체도 있다. 문제는 문화다. 창조와 혁신의 문화는 ‘유교적’인 문화와 충돌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디지털 선구자들은 권위를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정경유착 같은 게 나쁘다는 것은 눈에 보인다. 그러나 과학기술과 문화도 유착 관계라는 것, 이 유착 관계가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덜 눈에 띈다. 팰로앨토연구소의 전신인 제록스 PARC에서 “미래를 예견하는 최고의 방법은 미래를 발명하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생겨났다. 미래를 발명하기 위해서는 문화 파괴라는 혁명이 필요하다.

[S Box]  프로그래머 원조는 바이런의 딸

여성은 과학이나 수학을 못한다는 전 세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편견이다.

 이 책은 편견에 의문을 제기한다. 12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에이다 러브레이스(Ada Lovelace, 1815~52)에서 시작해서 에이다로 끝난다. 저자 아이작슨에게 에이다는 ‘디지털 혁명의 어머니’다. 이 책은 에이다에게 보내는 헌사·오마주다.

 에이다는 영국 낭만파 시인 바이런(1788~1824) 딸이다. 어머니 애너벨러는 바람둥이인 바이런 때문에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 애너벨러는 가정교사를 구해 딸에게 수학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어쩌면 남편을 닮은 딸의 예술가적인 기질을 수학으로 길들이고 단련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스스로를 ‘시적인 과학자(poetical scientist)’라고 부른 에이다는 컴퓨터가 생기기 100여 년전에 프로그래밍의 개념을 구상했다.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다. 알고리즘으로 루틴(routine)한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에이다에게 컴퓨팅은 과학과 예술의 ‘결혼’을 의미했다. 인간에 대한 위협이 아니었다. 에이다는 이런 말을 남겼다.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상상력은 결합 능력이다. 상상력은 사물, 사실, 개념을 새로운 독창적인, 무한한, 모든 가능한 방식으로 결합한다.”

김환영 기자 whan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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