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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권 분열이 새누리당 꽃놀이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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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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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논설실장

박근혜 대통령(이하 경칭 생략)은 ‘단어(單語)의 정치인’이다. 10·26 사태 당시 “휴전선은요?”부터 면도칼 테러 직후 “대전은요?”가 압권이다. 그나마 기억에 남는 좀 긴 문장이라면 친박 공천 학살 때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 정도다. 그의 문장은 길고 딱딱하다. 하지만 단어는 선명하고 살아 있다. “배신의 정치” “진실한 사람”에는 예리한 날이 서 있다. 이와 반대로 문장의 정치인은 노무현이다. 그는 연설만큼 문장이 뛰어나다. 예의가 아닐지 몰라도 그의 유서에는 더하고 뺄 게 없다. “사는 것이 힘들고 감옥 같다…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오래된 생각이다.”

 어제 김한길의 탈당 회견문도 명(名)문장이다. 야권의 전략통이자 소설가 출신답다. “주저앉아 뻔한 패배 기다리고 있을 수 없다… 안에서 싸우다 기운을 소진해버리는 그런 정치 말고, 오만과 독선과 증오와 기교로 버티는 그런 정치 말고… 수명이 다한 양당 중심 정치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허물어내야 한다.” 곳곳에 복선을 까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늘의 제 선택이 고뇌가 깊어가는 동지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드리길 기대한다”며 추가 탈당을 주문했다.

 하지만 눈여겨볼 대목은 문장이 아니다. 오히려 김한길의 일문일답이다. “멀리 떠나는 게 아니다. 다만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떠날 뿐”이라고 했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머지않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얼마 전 만난 야권 전략통의 이야기와 맥이 닿아 있다. “현재의 잡탕밥으론 총선은커녕 대선도 안 된다. 친노와 호남은 DNA 자체가 다르다. 대선에 한 번 실패한 문재인의 대선 독주는 금물이다. 일단 떨어져 홀로 세워야 한다.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과 안철수신당이 60석, 40석을 차지하는 게 황금비율이다. 한쪽의 압승은 최악이다. 문재인도 살리고 안철수도 살려야 한다. 그러면 손학규도 살고 박원순도 산다. 그래야 대선에 기회가 생긴다.”

 문재인은 “비게 된 지역에 과감히 새 인물을 내세워 정치 물갈이를 하겠다”며 보복을 다짐했다. 하지만 현실감이 떨어진다. 김대중은 김종필과 손잡고 이겼다. 노무현도 ‘수도 이전’으로 충청표를 끌어들이고 정몽준을 발판 삼아 승리했다. 현재 구도에서 분열은 야권의 필패다. 친노운동권은 “원칙 있는 패배도 아름답다” “작지만 단단한 당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아마 ‘원칙’과 ‘아름답다’ ‘단단하다’는 장담은 두고봐야겠지만 ‘패배’와 ‘작아진다’는 전망은 곧 현실화될 듯 싶다.

 왜 친노운동권은 “배신자여, 갈 테면 가라”고 자신하는 걸까? 야당의 비주류 인사는 “두 번이나 맞은 모르핀 때문”이라 했다. 바로 노무현의 두 차례 이적(異跡)을 신앙처럼 믿는다는 것이다. 노무현의 정치적 죽음이라는 탄핵은 2004년 총선 기적을 만들었고, 2012년에는 그의 생물학적 죽음인 자살이 친노 쪽에 몰표를 안겨주었다. 유권자의 이런 호의가 거듭되면 권리인줄 아는 모양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이적을 믿기엔 친노운동권이 지역주의 도전과 권위주의 타파라는 노무현의 시대정신과 너무 멀어졌다. 더 이상 부활이나 신기루는 없을 듯싶다.

 오히려 그 다음 주목할 수순은 새누리당이다. 친박-비박의 분열이 당장 4월 총선에서 파국을 맞을 것 같지는 않다. 여당에는 ‘백의종군’을 통해 정치적 중량감을 키운 인물이 적지 않다. 김무성·오세훈에 이어 김태호까지 그런 경로를 밟고 있다. 하지만 대선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TK 표를 위해 “99번 울어도 100번째 웃으면 된다”는 김무성도 벼랑 끝 승부를 걸 게 분명하다. ‘진박 감별사’로 현대판 카스트 제도까지 만든 친박도 백기투항할 리 만무하다. 반기문 등 온갖 경우의 수를 대입해보고, 이원집정부제 등 개헌까지 시도할지 모른다. 일본의 역사적 경험도 그러하다. 야당인 사회당이 몰락하자 자민당이 오만해졌다. 그렇게 세포분열해 탄생한 게 일본 민주당이다. 김한길의 문장에서 “양당 중심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허물겠다”는 대목이 유독 눈에 띄는 까닭이다.

이철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