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사과·법적 책임 따지고 미국으로부터 실리 챙겼어야

중앙선데이

입력 2016.01.03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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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0호 31면

외교는 현실정치(realpolitik)에 기초하여 정책을 수립하기 때문에 실리를 챙기는 것이 핵심이다. 미국이 동맹국들에게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가입하지 말 것을 강력히 압박했지만 같은 앵글로색슨인 영국이 1조5000억 달러 국채발행 커미션을 노리고 AIIB에 가입했고, 프랑스와 독일은 자기네 고속철을 중국에 판매하려는 계산으로 영국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실리가 중요한 외교에서도 가끔 명분이 더 중요한 경우가 있다. 위안부 문제가 그렇다. 위안부 문제는 단순히 배상 혹은 보상의 문제가 아니다. 그 이면에는 여성으로서의 존엄과 민족의 자긍심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위안부 문제는 인권을 침해한 반인륜적인 사안이기 때문에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일본이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부는 2005년 위안부 문제가 1965년 청구권 협정에서 해결되지 않았다고 결론내렸다. 정부가 이 기조를 유지하고 진정한 사과와 법적 책임의 약속을 받았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기시다 외상이 귀국해서 “일본이 잃은 것은 10억엔 밖에 없다”고 한 발언과 “소녀상을 철거하지 않으면 10억엔을 안 줘도 된다”는 일본의 입장이 거론되는 건 정부의 문제의식이 투철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중국의 부상을 견제해야 하는 워싱턴 외교안보 전문가들의 가장 큰 우려는 악화되는 한일관계였다. 아베 총리도 한국과 관계를 개선하라는 미국의 압박 때문에 위안부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번 합의를 이해해달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메시지를 보면 미국에 의존도가 높은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해석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 납득할 만한 협상 결과를 냈어야 한다.2008년 금융위기 당시 우리는 미국과 통화 스와프를 체결하여 위기를 극복했다. 달러의 힘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만약 한일관계 개선의 대가로 미국한테 통화 스와프와 3000t급 핵잠수함 건조, 800km에 묶인 미사일 사거리 제한 해제, 차세대 전투기 기술이전, 순항 미사일 정확도 조정 소프트웨어 개발권 등을 요구해서 받아냈다면 국민들은 국익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실리를 추구하는 정부를 지지하지 않았을까?


국민들은 리더십 실종과 국가전략 부재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가혹한 조건을 내세워 한국으로부터 벌어들인 돈으로 워싱턴에 새로운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된 사실을 우리 국민이 알게 된다면 분노할 것이다. 위안부 협상 과정을 보면서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조금씩 세월호처럼 가라앉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일 것이다.


4년 만에 교역량 1조 달러 선이 붕괴됐다. 정치 지도자들은 성장이 한 단계 더 도약하여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구 온난화로 인한 북극의 해빙으로 부산에서 유럽까지 북극항로를 사용할 경우 남항로 보다 약 10일의 기간과 25%의 비용이 절감된다. 북극항로를 우리가 먼저 개척하면 우리 조선업은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 있고 우리는 아시아의 물류허브로 부상하여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인천·부산·광양을 각각 상해·광동·천진와 연계해 도시 대 도시의 자유무역구로 개방해 우리 금융 및 의료 서비스가 진출하는 기회를 제공해 일자리 창출하는 방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최근 북해도에 개통된 신칸센이 러시아 캄차카반도로 이어져 가스관과 철도가 시베리아에서 북해도로 연결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북한을 통과하는 가스관과 철도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비전이다.


김현종전 통상교섭본부장·전 유엔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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