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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기반 닦은 해리슨의 정밀 태엽시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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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0호 20면

그림 1 윌리엄 터너, '미노타우르 호의 난파', 1810년경.

영국을 대표하는 화가 월리엄 터너는 1800년대 초부터 폭풍우에 휩싸인 바다 모습에 푹 빠졌다. 네덜란드에 가서 이 주제의 그림들을 자세히 공부하고 돌아온 그는 1805년에 그림 1을 그리기 시작해 5년 후인 1810년에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해 영국 군함 미노타우르 호가 네덜란드 연안에서 좌초해 선원 500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나쁜 날씨와 위치측정의 오류가 빚은 참사였다. 이 사고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자 터너는 그림의 제목을 ‘미노타우르의 난파’라고 붙여 발표했다. 애초의 소재는 난파한 상선이었지만 대중의 이목을 받는 게 우선이었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난파선 그림을 많이 남겼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중상주의 시대에 대양을 주름잡은 국가들이니 난파의 사례가 많았다. 또한 철도와 공장이 등장하기 전에는 해상 조난사고만한 대규모의 재해가 드물었다. 대자연의 위력 앞에 속절없이 희생되는 인간이라는 비극적 주제에 화가들이 주목한 것은 당연했으리라. 사실 미노타우르 호 참사는 영국이 경험한 최악의 난파사고가 아니었다.


해로 벗어나 수천명 죽는 사고도약 1세기 전인 1707년 여름, 유럽 국가들이 스페인 계승전쟁에서 편을 갈라 해전을 치르고 있었다. 영국 해군은 프랑스 남동부의 군항 툴롱을 공격한 후 귀환명령을 받았다. 영국 함대는 지중해를 벗어나 군항 포츠머스로 돌아오는 길에 예상치 못한 악천후를 만나 위치를 잃었다. 결정적인 문제는 경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안전한 해로를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한 함대가 실은 험한 바위들로 악명 높은 실리 제도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 척의 함선이 좌초되었고 2000명에 육박하는 승조원들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영국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경도를 정확히 파악하는 작업은 단순히 안전 확보와 과학적 성취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콜럼버스의 역사적 항해 이후 유럽 국가들은 앞 다투어 새 항로를 개척하고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렇게 막이 오른 중상주의 시대를 선도하려면 무역에서 앞서야 했고, 대양을 누빌 수 있는 강력한 해군력을 갖춰야 했다. 상선이든 군함이든 항해 중에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게 필수임은 당연했다. 위도는 측정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정오에 태양이 위치한 각도를 측량함으로써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밤에 특정한 별의 위치를 재는 방법도 가능했다. 이와 달리 경도는 효과적인 측량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목성 주위를 도는 네 위성인 ‘갈릴레이 달들’의 움직임을 망원경으로 관측해 시간 경과를 파악함으로써 경도를 추정하는 방법이 제시됐지만, 바다에서는 이 방법의 실용성이 크게 떨어졌다. 낮이나 흐린 밤에는 관측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유럽 국가들은 경도 문제 해결에 고심했다. 최고 두뇌들이 이 문제에 뛰어들어 해결책을 찾아 주길 기대했다. 다른 국가들과 경제·군사적 경쟁을 벌이고 있던 국가들은 여기에서도 경쟁체제를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를 고안해 냈다. 경도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에게 국가가 포상을 한다는 아이디어였다. 16세기 말 이래 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가 모두 이런 포상 제도를 내걸었다. 그러나 18세기 초까지도 상을 받을 만큼 두드러진 성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림 2 경도위원회의 모임 장면, 18세기.

뉴턴·핼리 등이 이론 만들어이번에는 영국 차례였다. 1714년 영국 의회가 경도법(Longitude Act)을 제정했다. 경도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이에게 최대 2만 파운드, 오늘날 가치로 약 45억 원에 이르는 상금을 수여하기로 했다. 오차가 56㎞ 이내라는 조건이었다. 오차가 이보다 클 경우 경도위원회의 판정에 따라 절반 정도의 상금을 주기로 했다. 당시 영국 과학계를 이끌던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과 핼리혜성의 발견자 에드먼드 핼리가 이 기획을 주도했다. 그림 2는 경도위원회의 회합 장면을 보여준다. 위원들은 제안된 다양한 경도 측량법에 대해 신뢰도를 검증하고 상금을 결정했다. 참석자들의 복장과 가발, 회의장의 분위기에서 위원들의 사회적 위상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경도 문제의 해결책도 과학자들의 두뇌에서 나왔을까? 뉴턴을 포함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천체의 움직임에 해답의 열쇠가 있을 것이라고 봤다. 별과 달의 상대적 위치 변화가 단서가 될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달이 지나가는 길에 있는 특정한 별을 정하고 기준이 되는 지점에서 별과 달이 만나는 시각과 배가 위치한 곳에서 만나는 시각을 비교하면 경도를 알 수 있다는 의미다.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한 시간 차이가 난다면 경도 15도(360도/24시간) 차이가 나는 셈이다.


그러나 제시된 방안들 중에 경도법의 기준을 충족하는 것은 없었다. 핵심 문제는 선박이 위치한 특정 지점에서 시간을 정확히 계측할 방법이 없다는 점에 있었다. 진자를 주로 사용하던 당시의 시계는 정확도가 낮았다. 출렁이는 선박 위에서는 더욱 그랬다. 게다가 장거리 항해를 위해서는 소금기에 부식되지 않아야 하며 온도·습도·압력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했다.

그림 3 토머스 킹, '존 해리슨', 1765~6년.

천제물리학 이론을 만들어 낸 과학자들과 달리, 성능이 뛰어난 시계를 제작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대표적 인물이 존 해리슨(John Harrison)였다. 영국 북부의 시골 출신 시계공이었던 해리슨은 21세 되던 해에 경도법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고도의 과학 지식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시계 제작에는 자신이 넘쳤던 그는 본격적으로 해양시계 제작에 나섰다. 전통적인 시계추 대신 정밀한 태엽을 이용한 혁신적 구조를 설계했고, 부품의 수를 가능한 한 줄였으며, 마찰을 최소화하는 소재로 바꿨다. 크로노미터(chronometer)라고 불리는 첫 해양시계 H1이 1735년에 나왔다. 그리고 끊임없는 개량을 통해 1740년대부터 H2와 H3가 차례로 탄생했다. 그 과정에서 바이메탈 띠, 롤러베어링과 같은 개량이 더해졌다. 해리슨의 혁신 마인드는 멈출 줄 몰랐다. 68세 때인 1759년, 마침내 그는 작지만 빠르고 정확한 밸런스를 갖춘 회중시계 H4를 만들어냈다. 지름 13cm에 불과한 이 자그마한 기계장치는 불굴의 기술자가 수십 년 동안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이룩해낸 훌륭한 성과였다. 토머스 킹이 제작한 그림 3에 H4를 오른손에 꼭 쥐고 있는 해리슨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의 오른쪽 어깨 뒤로 보이는 희미하게 보이는 기계장치가 H3다.


과감한 인센티브로 혁신 이끌어내이제 경도위원회 앞에서 H4의 정확성을 입증하는 일만 남았다. 실험은 1761년 자메이카로 향하는 배에서 이루어졌다. 81일에 걸친 여정 끝에 H가 5초의 오차를 보였다. 거리로 환산하면 불과 약 2km 차이였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주도하는 경도위원회는 이 결과가 우연이라며 재시험을 요구했다. 바베이도스로 향하는 2차 실험에서 오차는 39초, 즉 16km로 나왔다. 여전히 좋은 기록이었다. 하지만 경도위원회는 완전한 성공으로 인정하기를 꺼렸다. 분개한 해리슨은 국왕 조지 3세에게 탄원하여 직접 실험해 보게 했다. 1773년 마침내 해리슨에게 상금을 수여하기로 최종 결정됐다. 그의 나이 80세, 사망하기 불과 3년 전이었다.


이후 해리슨의 해양시계는 대양 항해의 필수품이 됐다. 전설적 탐험가 쿡 선장은 1770년대에 태평양을 항해할 때 H4와 유사한 해양시계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 기계장치는 19세기까지도 장거리 항해에 필수품이 됐다. 영국의 대양 제패에 크게 기여한 것은 당연했다.


보상제도는 혁신의 인센티브가 될 수 있다. 해리슨의 해양시계는 이를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물이다. 그러나 최종 수상자가 될 때까지 그가 겪은 고난은 보상제도가 잘 작동하지 않을 위험이 있다는 사실도 말해준다. 소수의 기득권층이 차별적 장벽을 구축해놓은 사회에서는 능력만 있고 배경이 약한 개인이 잠재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그런 국가가 경쟁력을 가질 리도 만무하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bks21@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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