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클래식의 향연(饗宴)] 제3의 황금기 구가하는 리카르도 무티와 시카고 심포니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특별한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악단의 존재감 세계로 확산… 1월 28일 한국 공연은 마에스트로의 전성기 확인할 절호의 기회

기사 이미지

시카고 심포니를 이끌고 1월 내한하는 리카르도 무티는 1971년 도니제티 오페라 ‘돈 파스칼레’로 데뷔하면서 세계 음악계에 이름을 알렸다. / 사진 제공·빈체로 ⓒTodd Rosenberg

클래식 비즈니스에서 미국은 독립시장이다. 50개 주가 사실상 유럽의 50개국처럼 독자적인 흥행 기반을 갖고 있다. 공연장과 예술단체 운영에 시와 정부 재정이 투입되는 유럽과는 달리 미국 예술기관의 자립은 기부와 티켓 구매를 근간으로 한다. 미국 전역에 분포한 대학들이 부설 공연장과 펀드를 통해 예술가의 공연을 유치하면서 미국 클래식 문화를 살찌운다.

서양 부자들이 무티의 교향악에 열광하는 이유는?

미국 오케스트라는 평양까지 방문한 뉴욕 필을 제외하곤 유럽권 악단에 비해 아시아 방문에 미온적이었다. 악단 수입을 해외 투어로 벌어들이지 않아도 미국 내 수익으로 충분히 운영이 가능하고, 단원 노조가 원거리 비행이 수반되는 아시아 투어에 소극적이다. 2005년 8월 14일자 LA 타임스의 마크 스웨드가 제시한 ‘아메리칸 Big 7’ 오케스트라(뉴욕 필하모닉, 보스턴 심포니, 시카고 심포니,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LA 필하모닉) 가운데 2000년대 이후 한국을 찾은 곳은 뉴욕 필(2002, 2004, 2006, 2008, 2009, 2014년), 시카고 심포니(2013년),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2010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2005, 2008, 2010년), LA 필하모닉(2008, 2015년)이었다. 2016년에는 시카고 심포니(1월 28~29일 예술의전당)와 샌스란시스코 심포니(11월 9~10일 예술의전당)가 한국을 찾는다.

미국에서도 듣기 어려운 환상의 사운드

기사 이미지

2010년 무티와 새로운 시즌을 시작한 시카고 심포니는 “빈 필, 베를린 필과 비교해 충실하고 안정감 있다”는 평가를 얻으며 제3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다. / 사진 제공·빈체로 ⓒTodd Rosenberg

1월뿐 아니라 2016년 상반기 가장 주목되는 오케스트라 공연은 음악감독 리카르도 무티(Riccardo Muti, 74)와 함께 내한하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CSO) 공연이다. 2013년 무티의 급성 독감으로 로린 마젤이 대신 아시아 투어에 출연한 이래, CSO가 3년 만에 갖는 두 번째 내한이다. 무티 개인으로선 12년 만의 네 번째 내한(1985년 필라델피아, 1996·2004년 라 스칼라 필하모닉)이다. 미국 오케스트라의 자존심의 실체가 무엇인지, 시대를 대표하는 마에스트로의 전성기를 한눈에 확인할 기회다.

미국 오케스트라들은 각각의 지역성으로 변별할 수 있는 음질과 레퍼토리 면의 특징을 갖고 있다. 보스턴 심포니가 원만하고 균형감각이 뛰어난 유럽 오케스트라에 가까운 음악을,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가 중부 유럽을 방불케 하는 중후한 사운드를 이어온 반면, 뉴욕 필은 유럽 오케스트라가 몇 세대에 걸쳐 매만진 사운드에 기능주의를 더한 형태를 취한다. CSO는 여느 라이벌 악단에 비해 화려한 음색을 자랑한다.

흔히 시카고 하면 갱이나 금주법 시대의 알코올 밀조, 재즈나 현대 건축을 쉽게 연상하게 되는데 CSO의 오케스트라 홀인 시카고 심포니 센터는 보티첼리의 대표적 그림인 ‘비너스의 탄생’에서 비너스가 올라탄 조개모양의 천장이 관객을 압도하는 곳이다. CSO의 사운드는 이곳의 음향적 특징에 최적화되었다. 스테이지의 좌우 폭이 좁은 대신 아름다운 천정을 향해 음을 울리는 습관을 들인 것이 CSO의 화려한 사운드를 강화했다는 견해도 있다. 그래서 풍부한 오케스트라의 음색을 잘 살려낼 음악감독이나 세묜 비치코프, 정명훈, 마크 엘더 같은 객원 지휘자를 만나면 CSO는 미국 어느 곳에서도 듣기 어려운 환상적인 사운드를 냈다.

1891년 창설된 CSO는 2016년으로 125주년을 맞았다. 125년에 걸쳐 10명의 음악감독을 배출한 CSO의 역사는 두 명의 헝가리 지휘자, 프리츠 라이너(1953~62)와 게오르크 솔티(1969~91) 재임기 동안 두 번의 황금기를 거쳤다. 유진 오먼디, 안탈 도라티, 조지 셀, 게오르크 숄티, 이반 피셔로 이어지는 ‘지휘계 황금 광산’ 헝가리 명지휘자 계보의 정점에 위치한 프리츠 라이너는 CSO의 토대를 구축한 지휘자로 평가받는다.

매너리즘에 빠진 수석 연주자를 적극적으로 교체했고 독주 연주자로 절정을 달리던 첼리스트 야노스 슈타커를 악단에 영입하려 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CSO 사운드에 급격한 발전을 이뤄냈고 라이너는 RCA 레이블에서 대량 녹음으로 이를 증명했다. ‘현의 보스턴 심포니, 금관의 시카고 심포니’라는 도식은 라이너의 혹독한 훈련 덕분에 탄생됐다.

그러나 라이너는 단원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투어에서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단원들과 끊임없이 갈등했고 22년간 CSO에 몸담았던 솔티가 현재 CSO가 구가하는 악단의 명성을 완성한 인물이다. 미국 전역은 물론 유럽과 아시아 투어를 활발히 다니면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앙상블이라는 찬사를 곳곳에서 얻었다. CSO 감독에서 물러나 1997년 타계할 때까지 20세기 거장형 지휘자와 메이저 오케스트라의 상생형 모델을 제시했다.

젊은 시절에는 밀라노 태생의 아바도와 앙숙

솔티 시절 CSO 사운드는 강인한 앙상블과 파워풀한 사운드로 특징 지워졌고 말러, 브루크너, 바르토크 등 여러 사조에서 베를린 필, 빈 필에 뒤지지 않는 역량을 보였다. 솔티는 특히 클라우디오 아바도,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처럼 자신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지휘자를 CSO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영입해서 악단의 컬러를 다채롭게 했다.

2010년 무티와 새로운 시즌을 시작한 CSO는 “빈 필, 베를린 필과 비교해 충실하고 안정감 있다”는 평가를 얻으며 제3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다. 2014년 4월, 음악감독의 임기를 2020년까지 연장한 것이 그 증거다. 재계약 사항은 음악감독의 주요 역할인 정기 연주회 지휘와 미국내 투어, 해외 공연과 앨범 작업이었다. 무티가 CSO의 재임 초기 시절 집중한 역량은 국제적 위상과 평판의 제고였다. 자신이 오랫동안 몸담았던 라 스칼라 필하모닉과 함께 방문했던 도시에 이번에는 CSO와 함께 찾아가 특별한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악단의 존재감을 세계로 확산시켰다.

정기 연주회 판매 수익과 기부금 규모가 매년 연속 성장했고 재정 기반이 탄탄해지면서 악단과 음악감독은 이제 예술적 발전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CSO의 전 이사회 의장 멜빈 버린 부부는 무티와 CSO가 바로크나 현대곡이 아닌 고전 클래식 작품을 연주하는 공연에 한정해 200만 달러(약 21억원)을 기부하는 약정에 사인할 만큼 수퍼리치들이 무티의 클래식 해석에 보내는 지지도 절대적이다. 무티가 CSO 연주로 얻는 연 소득은 200만 달러를 호가하는 것으로 미국의 언론들은 추정한다.

1941년 나폴리 태생의 무티는 바이올린을 공부한 후 피아노로 전향했다가 밀라노 베르디 음악원에서 보토에게 지휘를, 브티넬리에게 작곡을 배웠다. 1965년 여름에 단기간이었지만 프랑크 페라라에게 지휘 레슨을 받은 것이 음악적 진로를 결정하는 데 이정표가 됐다. 베르디 음악원을 졸업하기도 전에 오페라 지휘를 데뷔했고 귀토 칸텔리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이탈리아가 주목하는 청년 지휘자군에 합류했다. 1969년 피렌체 5월 음악제에 초대돼 음악감독에 오른 그는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경력을 쌓았다.

1971년 세계 최고의 음악축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도니제티 오페라 <돈 파스칼레>로 데뷔하면서 세계 음악계에 이름을 알렸고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유진 오먼디의 추천으로 같은 악단의 수석 객원 지휘자(1975)와 음악감독(1980)에 오르면서 세계 음악계의 핵심 지휘자로 부상했다. 같은 기간 영국에서도 오토 클럼페러 후임으로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1973)에 오른 것도 눈부신 성장이었다.

세계 최정상의 반열에 오른 것은 1980년대부터다. 1986년 같은 이탈리아 출신의 클라우디오 아바도(1933~2014)의 후임으로 밀라노 스칼라 가극장의 음악감독에 취임하면서 무티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지휘자로 웅비했다. 2005년까지 스칼라에 재직하면서 베를린 필, 빈 필에 정기적으로 객원 지휘에 나섰으며 런던과 뮌헨, 빈에서 오페라 전막에서 지휘봉을 잡았다. 보통, 세계 최정상급 지휘자 사이에는 친교 관계가 드물지만 무티는 오자와 세이지와 다니엘 바렌보임, 주빈 메타와 절친이며 명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1930~2004)와 친분을 나눈 보기 드문 인물이다.

젊은 시절에는 밀라노 태생의 아바도와 앙숙으로 불렸다. 아바도의 이름을 직접 부르기 싫어 ‘스칼라의 전임자’로 돌려 부른 것은 유명한 일화다. 둘 사이를 화해시키기 위해 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와 지휘자 바렌보임이 중재에 나섰지만 ‘베를린 필의 제왕’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89) 서거 이후 ‘포스트 카라얀’ 논쟁이 가열되고 아바도가 베를린 필 음악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무티는 경쟁 악단인 빈 필에 집중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의 세월이 지나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면서 아바도가 무티에게 협력의 손짓을 청했고 잡지를 통해 서로 호감을 갖고 있었다고 밝히면서 말년의 아바도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무티의 지휘 스타일은 오페라를 지휘할 때의 음색처럼, 오케스트라 지휘에서의 음색도 가수에게 노래시키듯, 또박또박 프레이즈를 짚어가는 게 특징이다. 단지 음을 길게 늘이는 것이 아니라 한 음 한 음을 충분히 끌어 소리를 내는 ‘테누토’의 의미를 무티만큼 잘 울리는 지휘자를 요즘 시대에선 찾기 어렵다. 카라얀이 ‘관객의 입장에서 지휘하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무티는 관중 서비스도 풍부한 지휘자다. 작품이 갖고 있는 극적인 긴장구조를 물 흐르듯 천천히고조시키는 분위기에 충실한 지휘로 일반 관객이 보다 쉽게 음악에 몰두할 수 있도록 만든다.

오페라를 지휘할 때 무티는 작곡가와 가수 관계를 명쾌하게 정리하는 지휘자로 정평이 나있다. “미국에서는 보통 가수가 오페라에서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작곡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로 정리하면서 가수에게 “지금 노래할 극장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라”는 것을 시작으로 오페라의 방향을 다잡아간다. 실제로는 리허설 중에 농담을 많이 하는 편이지만 1990년대 이후 최고의 소프라노로 군림했던 안젤라 게오르규는 무티에 대해 “성악가 의견을 무시하고 연출가도 휘어잡는 독재자”로 혹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악보를 잘 본다고 모든 지휘자가 음악감독이 될 수 없듯, 어중간한 통솔력으론 무티같이 오랫동안 오페라극장 음악감독을 수행할 수 없다.

“지휘자는 외교관, 심리학자의 마인드 갖춰야”

주요 레퍼토리는 모국 이탈리아 작곡가의 오페라를 젊은 시절부터 많이 남겼다. 2000년대 들어 빈 필과 슈베르트, 모차르트, 하이든 교향곡을 녹음하면서 명실 공히 거장 지휘자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베토벤, 브람스, 슈만, 슈베르트, 차이콥스키, 스크랴빈 교향곡을 전곡으로 녹음했다. 라 스칼라 오페라 시절에는 케루비니 같은 무명 작곡가의 오페라나 부조니, 니노 로타 같은 20세기 이탈리아 신고전주의자 작품을 즐겨 녹음했다. 작곡가의 자필 악보를 기반으로 악보와 다르게 소화하는 가수들에겐 엄격한 모습을 보였다. 라 스칼라에서 파업이 발생하면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공연을 강행하려 한 에피소드도 있다.

그러나 2005년 3월 16일 라 스칼라 필하모닉 단원들과 오페라극장 직원들의 압도적인 비토에 의해 감독직 수행에 대해 불신임을 받았다. 극장의 총지배인 카를로 폰타나와 무티와의 권력 다툼이 원인이었는데 당시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와 막역한 사이의 무티가 좌파 성향의 폰타나와 화합 대신 정치싸움을 하느라 극장 운영을 파국으로 몰았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음악가와 권력자 사이의 비판적 거리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산증인이다.

라 스칼라에서의 불명예 퇴진 이후 얼마 동안의 객원 생활 동안 러브콜을 보낸 곳은 뉴욕 필이었다. 뉴욕 필은 2009~2010 시즌 해외 투어에 무티를 기용하겠다고 밝히면서 수석 객원 지휘자에 준하는 대우를 약속했다. 그러나 2008년 무티가 정한 행선지는 뉴욕 필의 라이벌인 시카고 심포니었다. 무티가 자리를 찾기 전까지 시카고 심포니 음악 감독은 현역 세계 명지휘자들이라면 누구나 도전하고픈 최고의 포스트였다.

무티는 스스로를 독재자로 칭하진 않지만 “지휘자는 독재자로 보일 만큼 확고한 주관이 있어야 하고, 100여 명의 단원을 다루기 위해 외교관이자 심리학자의 마인드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근에는 백내장으로 인한 시력 감퇴로 안경을 쓰고 지휘하고 시력 보호를 위해 사인회에서 사진 촬영은 엄격히 금하고 있다. 실제로 보면 단신의 키여서 무티보다 키가 큰 협연자들은 협연이 끝나고 인사할 때 거리를 두느라 난처함을 호소하기도 한다. 2011년 2월에는 CSO 리허설 도중 정신을 잃고 쓰러지면서 턱뼈가 부러졌고 최근에는 심장 박동기를 착용하는 등 건강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한국인 기악 연주자 가운데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사라 장과 교분을 나눴다.

- 한정호 음악평론가

기사 이미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