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사설 인사이트

'정보유출 만능키' 된 주민등록번호, 전면 재검토할 때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기사 이미지
주민등록번호 앞 여섯 자리는 생년월일이다. 그렇다면 뒤 일곱 자리 숫자는 무슨 의미일까?
첫 번째 자리=성별. 1990년대 태어난 남자는 1번, 여자는 2번이다.
두 번째~다섯 번째 자리=최초 주민등록번호 발급기간 고유번호.
여섯 번째 자리=신고 순위.  신고 당일 같은 지역의 같은 성(姓)을 쓰는 사람들 중 몇 번째로 신고 됐는지를 표시한다.
일곱 번째 자리=오류 수정 번호. 위조됐거나 잘못 기재된 번호인지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12자리 수를 특정한 계산식에 대입해 산출된다.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출생신고를 할 때 이러한 주민등록번호를 배정받는다. 이 번호를 갖고 평생 살도록 하는 주민등록법 조항에 대해 지난주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다. 헌법재판소가 ‘주민등록번호 불변(不變)’ 원칙에 대해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지나치게 침해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돼 생명이나 신체를 위협받거나 재산상 피해를 입을 우려 등이 있는 경우 늦어도 2018년부터는 번호를 바꿀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우리는 예외적인 주민등록번호 변경이란 소극적 방식에 그칠 게 아니라 관련 제도 전반을 재검토해야 할 때라고 본다. 그 이유는 현행 주민등록 제도가 그 시대적 수명을 다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행 제도는 1968년 주민 이동 실태 파악과 간첩 색출 등 국가안보 및 주민관리 차원에서 도입됐다. 이런 목적에 따라 주민등록번호 부여 방식도 철저히 개인정보에 기반을 두고 있다.

기사 이미지

◇주민등록번호, 단순한 개인식별번호 넘어 표준식별번호 기능
 도입 당시 지역과 거주세대, 개인번호 등 12자리 숫자로 구성됐던 주민등록번호는 1975년부터 생년월일, 성별, 지역 등을 표시하는 현행 13자리 숫자 체제로 굳어졌다. 번호만 보면 개인의 나이와 성별, 출신지역까지 알 수 있게 돼 있는 것이다. 행정편의를 위해 인간을 제품처럼 일련번호를 붙여 관리해온 셈이다.

기사 이미지

 더 큰 문제는 헌법재판소도 지적했듯 주민등록번호가 ”단순한 개인식별번호를 넘어 표준식별번호로 기능함으로써 개인정보를 통합하는 ‘연결자(key data)’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운전면허번호나 예금계좌번호, 건강보험번호, 여권번호 등도 개인식별번호 역할을 하지만 그 중심엔 주민등록번호가 있다.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에서 제공하는 국가법령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주민등록번호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법률 77개, 시행령 404개, 시행규칙 385개, 별지서식 7648개에 달했다(신영진·한상국, 2013년 논문).

 이처럼 ‘만능 키’처럼 쓰이는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되거나 오·남용될 경우 사생활이나 재산에 피해를 입는 것은 물론이고 생명까지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실제로 정보기술(IT) 시대에 접어들면서 은행이나 기업, 카드회사, 인터넷 포털 등에서 수십만 건에서 1000여만 건 씩 크고 작은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유출된 주민등록번호 수를 모두 합치면 3억7400만 건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가 나와 있을 정도다. 2012년 주민등록번호 도용 등 침해가 전체 개인정보 침해 신고 및 상담 건수의 83.7%(13만9724건)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민등록번호를 예외적으로 변경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것만으로는 사태 해결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주민등록 시스템 자체를 수리하지 않는다면 ‘번호 유출→오·남용→번호 변경’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소를 잃은 뒤 외양간을 고칠 게 아니라 소를 잃지 않을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더 이상 늦추지 말고 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 장 열어야
 미국과 영국, 독일, 캐나다, 일본 등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식별번호 자체에 민감한 개인정보를 집어넣지 않는다. 아울러 IC칩이 내장된 전자신분증을 도입하거나 전환을 검토하는 나라도 증가하는 추세다. 한국도 1996년부터 전자주민카드 도입을 검토하기 시작해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 전자주민카드 전면 도입을 골자로 하는 주민등록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기사 이미지

 표면에 기재하는 정보는 성명, 사진, 생년월일, 주소 등으로 최소화하고 주민등록번호와 지문 등 민감한 개인정보는 IC칩에만 저장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부는 주민등록번호 대신 발행번호를 사용하면 주민등록번호 오·남용을 막을 수 있다고 했지만 “정부의 감시와 통제가 심해질 것”이란 시민단체들의 우려를 넘어서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무작위 부여 방식 등 주민등록번호 개선방안을 검토했으나 현행 체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이제는 더 이상 주민등록 제도 개편을 늦추기 어려운 상황이다. 국회에도 “주민등록번호를 무작위로 추출한 임의번호로 바꾸자”는 법안들이 제출돼 있다. 학계에서는 ^기존 주민등록번호를 중앙기관에서 관리하고 대신 신분증 발행번호를 사용하는 방안 ^주민등록번호를 임의번호로 바꾸되 신생아부터 적용하는 방안 등 다양한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주민등록번호 체제 교체는 결코 만만치 않은 비용이 소요되는 사안이다. 교체할 경우 얼마나 많은 직·간접 비용이 들어가는지, 국민 불편이 얼마나 커지는지 등도 살펴야 한다.

기사 이미지

 정부와 국회는 주민등록번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관한 논의의 장을 열고 종합적인 재검토 작업을 벌여야 할 때다. 개선 의지만 있다면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면서도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대안을 내는 게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까지 제품 일련번호 같은 주민등록번호를 달고 살 순 없지 않은가.

 ▶View & Another
 현행 주민등록번호의 존치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작지 않다. 연말정산부터 전입신고까지 일괄적으로 할 수 있는 서비스가 가능한 건 주민등록번호 덕분이라는 것이다. 상당수 IT 연구기관들은 한국의 전자정부가 이만큼 발전하는 데는 주민등록번호 체계가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제시하고 있다. 또 주민등록번호를 교체할 경우 막대한 비용이 투입될 가능성이 큰 게 사실이다. 하지만 권위주의 시대가 막을 내린 지금,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계속해서 희생할 수는 없다. 내 주민등록번호가 어디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모르고, 언제 범죄에 쓰일지도 모르는데 그 번호를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용하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주민등록번호 교체 비용이 큰 건 사실이지만 주민등록번호 유출에 따른 사회적 비용도 만만치 않다. 반드시 개편이 필요한 사안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범정부 차원의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질문을 댓글로 남겨주세요. 중앙일보 논설위원·기자가 정성껏 답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