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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아동학대 불감증’에 빠진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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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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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논설위원

미국에서 전문직업인으로 사는 그녀는 극도로 결혼을 기피했다. 남자친구가 프러포즈를 하자마자 헤어졌을 정도다. 엄마가 될 자신이 없어서였다고 했다. 그녀의 삶이 삐걱대는 건 어린 시절 친엄마로부터 당했던 정신적 학대의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그녀는 “미국의 훌륭한 교육시스템이 나를 키웠다”고 말한다. 엄마는 그녀가 학교에 가는 것도 못마땅해했지만 학교에 보내지 않았을 때 가해질 사회적 견제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보내줬다는 것이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자금 대출로 대학을 가면서 집을 떠날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민 가지 않고 한국에 살았더라면 학대에서 탈출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아동 인권 지키기 위해선 시민들이 먼저
아동학대에 취약한 문화 잔재 극복해야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돼 있다.’ 일반화된 명제지만 항상 참은 아니다. 생각보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유기하고 학대해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토대마저 빼앗는다. 게임중독 아빠에게 감금당했던 인천의 11세 소녀 예린(가명)이나 2년 전 계모에게 맞아 숨졌던 칠곡 소녀와 울산 소녀는 극단적인 학대의 사례다. 하지만 이들은 어쩌다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졌을 뿐이다. 아동학대가 공론화되지 않았던 지난해에도 17명이 학대로 사망했고, 아동학대로 판정된 신고 건수만 1만 건이 넘었다. 대개 신체적 상해가 분명한 경우들이 이렇다. 언어폭력과 정서적 학대는 거의 집계조차 되지 않는다. 언론에서 떠들지 않아도 아동학대는 이렇게 끈덕지게 계속된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가 아동학대를 처리하는 방식은 무심하다. 때로 엽기적 학대 사건이 알려지면 여론이 부르르 끓고, 정부는 단기간에 각종 대책을 내놓으며 뿌리를 뽑을 듯 목소리를 높이다 시간이 지나면 손 놓아버리는 게 우리의 방식이다. 아동학대 관련 인프라는 부족한데 내년도 관련 예산은 27%나 삭감됐다. 사건을 다루는 사법기관도 학대 피의자에게 관대하다. 학대는 상습적으로 이뤄지는 것인데도 지난해 아동학대 피해자 4명 중 3명은 다시 학대했던 부모에게 보내졌다. 웬만해선 격리나 친권 제한이 지속되지 않는다.

 법적 미비 때문이냐고? 아니다. 지난해 발효된 ‘아동학대특례법’으로 친권 제한이 좀 더 수월해졌다. 이명숙(한국아동학대예방협회 이사) 변호사는 “특례법이 아니더라도 아동을 격리 보호하고 친권을 제한할 수 있는 법적 장치는 다 있다. 일선에서 적극적이지 않을 뿐이다. 가장 큰 문제는 아동학대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너무 낮은 것”이라고 했다.

 진짜 문제는 우리의 ‘아동학대 불감증’인지도 모른다. 이번 예린이의 경우 이웃들은 “4년 전에도 폭행이 있었다”거나 “아이의 기괴한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등의 증언을 쏟아놓는다. 거리에서 피골이 상접한 아이를 발견한 어른은 그 아이를 다시 아버지 집에 데려다 줬다. 학교도 아이를 찾지 않았다. 누구도 아이를 도와야 한다고 자각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제 자식 죽이든 살리든 집안일’이라는 가부장적 문화유산이 ‘인권 우선’이라는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킨 것은 아닐까. 실제로 집안 단속을 최우선으로 하며 가장이 전권을 휘두르는 가부장적 가치는 집안의 약자인 여성과 젊은 세대의 희생 위에서 지탱해왔다. 가정조차도 강자와 약자로 갈리는 문화에서 체벌은 훈육으로 미화됐다. 가정 내 폭력은 공동체의 묵인 속에 가족 간 폭력의 사슬로 계승돼온 것이 사실이다. 이에 아버지도 약자가 되면 자식에게 학대당하는 기묘한 역전도 벌어진다.

 우리 사회는 애당초 가정폭력과 아동학대에 취약한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다는 걸 먼저 인식해야 한다. 그저 이에 순응해 살다 보면 우리는 나쁜 문화적 잔재를 계승하는 나쁜 사람으로 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시민정신과 깨어있는 의식이 시스템을 만든다. 반대로 아무리 좋은 시스템도 의식이 잠자고 있으면 무용지물이 된다. ‘가정 내 폭력도 폭력’이라는 의식으로 무장하고 견제하지 않으면 우리 이웃엔 계속 예린이가 살게 될 거다.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