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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상무2동 아이들’ 불행 대물림 끊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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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김호
김호 기자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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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호
사회부문 기자

 “크리스마스에 놀러 가려면 버스를 타야 하잖아요. 그런데 할머니는 버스를 탈 수 없어요. 아픈 다리를 쭉 펼 수 없거든요. 그래서 갈 수 없지만 괜찮아요.”

 광주광역시 서구 상무2동 임대아파트촌에서 집 나간 부모 대신 증조할머니(90)와 단둘이 사는 김모(6)군에게 이번 크리스마스는 없었다. 크리스마스에 놀러 가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김군은 어른처럼 덤덤해했다. 평범한 여섯 살짜리 아이의 투정을 찾아볼 수 없어 마음이 싸했다.

 김군의 처지가 더 안타까운 건 어려서부터 아빠와 비슷한 삶의 길을 걷고 있어서다. 김군의 아빠도 김군의 증조할머니가 키웠다. 증조할머니는 “지 아빠하고 어찌 그리 똑같이 살게 되는지…. 불행이 대물림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상무2동은 전체 가구 중 절반가량이 정부의 복지 지원 대상이다. 그래서 김군과 같은 아이들이 많이 산다. 부모가 아닌 할머니·할아버지의 손길이 자연스러운 아이들, 이제 혼자가 익숙해 외로움이 아무렇지 않다는 아이들이다.

 상무2동에서는 2009년부터 5년간 50명의 주민이 목숨을 끊었다. 원인은 가난 등 경제적 문제와 우울증 등 정신적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혔다. 김군과 같은 전국의 저소득층 아이들이 현재 겪고 있는 문제와 비슷하다. 김군의 증조할머니가 ‘불행의 대물림’을 걱정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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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모(6)군과 빈 병을 수거하는 증조할머니(90)의 성탄절은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프리랜서 오종찬]

 그래도 희망은 있다. 이웃들이다. 상무2동 주민들은 이웃의 자살을 막기 위해 지난 5월 구청·동 주민센터 공무원, 경찰관·소방관과 함께 ‘생명지구대’를 꾸렸다. 그리고 자살 위험에 노출된 이웃들을 수시로 찾아가며 살피고 있다. 상무2동 주민을 비롯한 자원봉사자들은 성탄절 전야였던 지난 24일 김군과 같은 아이들을 위해 산타복을 입고 집을 찾아가 선물을 건넸다. 로봇과 인형상자뿐 아니라 아이들이 함께 받은 건 그 속에 담긴 어른들의 따뜻한 관심이었다.

 상무2동 임대아파트촌의 외로운 세밑 풍경 보도(본지 12월 28일자 10면)를 접한 독자 수십 명이 생면부지의 아이들을 걱정하면서 e메일로 후원의사를 보내왔다.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고 소개한 독자는 “나 역시 가정형편 탓에 치매에 걸린 증조할머니와 조부모 아래에서 성장했는데 무엇보다 외로움이 힘들었다”며 “김군을 만나면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경신 전남대 생활환경복지학과 교수는 “아이들에게 닥친 불행의 대물림을 끊기 위해서는 주변의 관심이 절실한데 행정력에만 기대는 것은 한계가 있다”며 “결국 가장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이웃들”이라고 강조했다. 우리 곁에 많이 있는 ‘상무2동 아이들’을 위해 우리도 ‘생명과 희망의 지구대’를 꾸려 보자.

김호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