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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고립과 몰락 자초하는 친노 운동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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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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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논설실장

새정치민주연합이 쪼개질 모양이다. 주류(친노 운동권)와 비주류(호남·김한길계)는 불신을 넘어 서로 공포를 느낀다. 비주류는 친노파의 온라인 입당 봇물에 2012년의 ‘노(친노)·이(이화여대 라인)·사(486) 공천’ 악몽이 두렵고, 주류 측은 2002년 후단협(비주류의 노무현 후보 교체 요구) 트라우마가 겁난다. 이제 남은 수순은 비주류의 피해자 코스프레가 아닐까 싶다. 친노 패권주의에 쫓겨나듯 나와야 호남 민심을 자극할 수 있다.

“사회가 이만큼 나아진 게 보상이다
더 이상 대가를 바라면 불행의 시작”

 친노·86운동권에게 시련이 다가오고 있다. 솔직히 이들은 정치적으로 과잉대표된 측면이 적지 않다. 2004년 탄핵 역풍으로 손쉽게 제도권에 진입했다. 한때 폐족신세로 몰렸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하 경칭 생략)의 죽음과 무상급식 공약으로 2012년 다시 부활했다. 하지만 더 이상 호남의 지지 없이 정치생명을 연장하기는 어렵다. 2008년 총선에서 통합민주당은 81석에 그쳤다.

 야권은 어느새 ‘운동권 네트워크’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과거 전대협 출신과 진보 재야 그룹, 시민사회단체들이 서로 지원하며 공생(共生)관계를 유지한다. 이들의 무기는 강력한 네트워크다. 대학 선후배나 운동권 시절 끼리끼리 맺어진 배타적이며 폐쇄적인 공동체다. 문제는 확장성이다. 비주류 측은 “선거 때 새 인물을 발굴해도 참여연대, 민변, 민교협 등 인적 풀이 뻔하다”고 비판한다.

 빈약한 정책노선도 단점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체질로 굳어졌다. 친노 운동권은 ‘감세=대기업 특혜’ ‘테러방지법=인권 탄압’이란 반발이 자판기처럼 튀어나온다. 이분법적 사고와 편가르기도 고질병이다. 합리를 내세우면 회색분자로 몰고, 대화와 타협은 ‘변절’로 간주한다. 대결과 투쟁 지상주의 가치관은 시대가 바뀌어도 그대로다. 오죽하면 야당 내부에서 “아직도 1987년의 지나간 잔칫상 앞에 서성이고 있느냐”고 비난할까.

 돌아보면 노무현의 시대정신은 지역구도 타파와 권위주의 내려놓기였다. 지금 친노 운동권은 그 정신과 거리가 멀다. 불출마는커녕 험지 출마까지 결사반대다. 오히려 노무현 정신은 대구에 연거푸 출마하는 김부겸에게서 발견된다. 안철수도 친노 운동권의 기득권과 패권주의를 핑계 삼아 탈당했다. ‘낡은 진보’를 청산하자며 “80년대 운동권 패러다임으론 2016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비난한다. 친노 운동권이 강경노선으로 치달을수록 호남 민심은 안철수 쪽으로 기운다.

 이제 친노 운동권은 개혁 대상이다. “운동권 인사들, 이제 애국심으로 물러나 달라”는 주문까지 나온다. 하지만 순진한 생각이다. 비단 야당 의원들뿐만 아니다. 의원보좌관, 비서관, 야당 당직자, 지자체 정무직, 외곽 사회단체 등에 줄잡아 1만 명 이상의 친노 운동권이 정치를 생업으로 삼고 있다. 자발적인 아름다운 퇴장은 기대하기 어렵다.

어쩌면 내년 총선이 최후의 심판대가 될지 모른다. 유권자 손으로 친노 운동권이 대거 강제퇴진 당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변수는 등 뒤로 다가드는 비수(匕首)다. 2세대 진보정치가 조성주는 “86운동권은 옛이야기만 하면 우월감에 빠진다”며 “모든 것을 ‘대통령의 문제’로만 몰아가면 세상의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고 했다. 앞으로 2030세대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노동 밖의 노동(비정규직)을 증오의 언어가 아니라 설득을 통해 바꿔가겠다는 포부다. 이제 친노 운동권이 “젊으니까, 자네가 옳다”고 읊조리는 것도 시간문제다. 작곡가 말러가 난해한 현대음악을 들고나온 수제자 쇤베르크에게 한 말이다.

 친노 운동권이 참고할 이야기가 있다. “어느 사회단체는 ‘되도록 운동권 출신은 쓰지 않는다’고 한다. 술 먹으면 지각하고, 근무를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운동권 출신의 희생과 헌신은 고귀했다. 그래서 사회가 이만큼이라도 나아졌다. 하지만 사회가 이만큼 나아진 것이 바로 대가요, 보상이다. 더 이상의 대가와 보상을 바랄 때 불행은 시작된다.” 오래전에 노회찬이 쓴 글이다.

이철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