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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의 유레카 유럽] 긴축 갈등에 테러·난민 덮쳐 틈 벌어지는 EU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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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흔히들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해라고들 말한다. 올해 유럽이 그랬다. 위기가 겹쳐왔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소되지 않은 채 동반 상승작용을 벌이고 있다.

국경 철조망으로 자유 이동 제약
남유럽발 기존 정치 붕괴도 가속
영국 탈퇴 움직임 등 앞날 불투명
NYT “유럽 벼랑 끝으로 내몰린 해”

 “유럽이 한계점에 도달했는가.”

 최근 뉴욕타임스에서 던진 질문이다. 이 신문은 “2015년은 유럽이 벼랑 끝으로 내몰린 해”라고 썼다. 보수성향의 위클리 스탠다드는 “EU의 쇠퇴와 몰락을 목격하고 있다”며 “20세기의 거대한 정치실험의 최후가 시작되고 있다”고 했다. 이어 “EU는 축소되거나 해체되는 길을 걸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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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세기 유럽은 번영하는 소프트파워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2008년 재정 위기 이후 그 빛을 잃더니 올해 경제·이민·안보에서의 위기로 휘청거리고 있다. 그 시작은 1월 프랑스 파리에서 터진 샤를리 에브도 테러였다. 알카에다와 이슬람국가(IS) 추종자들인 ‘외로운 늑대’(자생적 테러리스트)들이 벌인 일이었다.

 같은 달 그리스 총선에서 반긴축을 내건 시리자의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집권했다. 그 후 6개월간은 독일 주도의 반긴축 해법에 대한 치프라스의 저항이었다. 국민투표까지 갔다. 결국 치프라스가 백기를 들었다. EU 주류의 승리는 그러나 일시적이다. 그리스의 부채에 대해선 지속불가능하다는 공감대 때문이다.

 유럽 유권자들은 미국과 달리 유럽 경제가 여전히 고전하는 게 긴축 탓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긴축을 강제한 독일과 브뤼셀(유럽연합·EU)에 대한 반감이 거세졌다.

 여름부터는 난민 위기가 압도했다. 터키-그리스를 통한 육로가 새로 열리면서 매일 수백 명, 수천 명이 국경들을 걸어서 넘었다. 초기엔 독일·스웨덴·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인도주의 차원에서, 또 고령화에 따른 젊은 노동인구 감소란 경제적 이유에서 난민들은 환대하던 분위기였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속적인 대량 유입에 기류가 급변했다. 국경에 철조망을 세운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를 비난하던 오스트리아·슬로베니아 등도 철망을 세우기 시작했다. 독일도 일부 국경통제를 했다. 사실상 유럽 통합의 상징으로 역내(域內) 자유이동을 보장한 솅겐 조약이 누더기가 됐다.

 지난달 파리 테러로 130명이 숨졌다. 테러 총책인 모코로 이민 2세인 벨기에인 압델하미드 아바우드가 시리아에서 파리로 잠입했다. 테러범 중엔 시리아 여권 소지자들도 있었다. 솅겐 조약엔 결정타가 됐다. 주권과 관련된 휘발성 있는 이슈인 난민과 안보가 한 덩어리가 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럽으로선 대형 태풍 두 개를 맞은 격이다.

 사실 EU의 의사결정 구조는 이런 난제를 해결하는데 취약하다. 행정부 격인 유럽연합 집행위(EC)와 유럽의회, 각국 지도자들의 회의체인 EU 정상회의가 맞물려 복잡하게 작동하는 시스템이어서다. 난민 할당제에서 드러나듯 사실상 합의에 이르기도, 합의한 들 실행하기도 어렵다. 그러는 사이 유권자들에겐 브뤼셀은 중요한 순간에 우유부단하거나, 아니면 자국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강제하는 거대 권력인 듯 비쳐졌다.

 그나마 경제 이슈에선 독일의 리더십이 작동했다. 난민·안보 이슈가 걸리면서 반대 목소리가 집요해졌다. 동유럽의 모범생으로 서유럽의 가치를 성실하게 대변해왔던 폴란드도 정권교체와 함께 최근 돌아섰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사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정정은 불안해지는데 EU는 더 이상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고 있다. 러시아를 보는 복잡한 시선 때문이다. 안보 위협이지만 시리아에선 해법의 일부다. 에너지원이기도 하다. 미국과 달리 유럽은 러시아에 대해 어정쩡한 상태다. 

 이 여파로 기존 정치질서는 무너지고 있다. 남유럽에선 이미 진행형이다. 그리스에 이어 포르투갈에서도 11월 선거에서 좌파 연정이 탄생했다. 스페인에서도 33년간 이어져온 좌파 양당 체제가 무너지고 4당 체제가 됐다. 프랑스에서도 마린 르펜이 이끄는 극우정당인 ‘국민전선(FN)’이 3당 체제의 구성원이 됐다. 가장 유럽적인 정치지도자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얼마 전까지 재집권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이제는 그의 후계자들이 거론되는 실정이다. 최근 덴마크 국민이 국민투표를 통해 EU와 사법부문 협력을 통해 EU 통합을 강화하자는 내용의 정부 제안을 부결시킨 일도 있다. 전문가들은 “선출직인 국가 지도자들이 유럽 통합 등 유럽적 이슈를 추진하는 게 정치적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잘 안다”고 분석했다.

 이런 흐름에 대해 EU의 인사이더인 마리오 몬티 이탈리아 전 총리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과거를 돌이켜 보면 EU는 위기 속에서 성숙했다. 달리 말해 위기 속에서 회원국의 정책 협조와 협력이 강화돼 왔다”며 “나는 느리게나마 계속 진전이 이뤄질 것으로 본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은 이미 EU가 느슨해지는 쪽으로 움직인다. 당장 영국이 그렇다. 보다 주권을 발휘하는 쪽으로 EU와 재협상을 하고 내년 그 결과를 가지고 잔류 여부(Brexit·브렉시트)에 대한 국민투표를 하겠다고 결정했다. 독일과 프랑스는 영국의 잔류를 위해 EU 시민 간 차별도 용인해줄 태세다. EU의 미래가 밝지만은 않은 셈이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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