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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백일 잔칫날 터졌다, 기성용 결승골 축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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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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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어리그 스완지시티의 기성용이 27일 웨스트브로미치와의 18라운드 경기에서 시즌 첫 골을 넣은 뒤 엄지손가락을 입에 무는 ‘젖병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딸 시온이의 탄생 백일을 축하하기 위해 젖병 세리머니를 펼친 기성용은 딸을 얻은 뒤 부쩍 성숙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스완지(웨일스) AP=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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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프로축구에서 뛰고 있는 기성용과 이청용·손흥민(토트넘)·윤석영(QPR·왼쪽부터). 박지성(왼쪽에서 둘째)과 함께 지난주 영국 런던에서 식사를 했다. [사진 박문성 해설위원 SNS]

2006년 9월 늦은 밤, 경기도 구리시 프로축구 FC서울 훈련장. 17세 청년이 가로등 밑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슈팅 훈련을 하고 있었다. 훈련장에 잠깐 들렀던 한웅수 당시 서울 단장(현 프로축구연맹 총장)이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옆에 있던 경비원은 “밤엔 훈련장 조명을 켜지 않는데도 저 청년은 매일 개인훈련을 한다. 참 독한 친구”라고 말했다. 경비원이 말한 청년은 바로 기성용(26·스완지시티)이었다.

웨스트브로미치 상대 시즌 1호골
가족들은 한국서 백일 기념 식사
아빠는 영국에서 젖병 세리머니
팀에도 83일 만에 소중한 1승 안겨
스완지, 16위로 올라 강등권 탈출

 기성용이 달밤에 훈련을 한 이유가 있었다. 신인이었던 기성용(1989년 1월생)은 당시 팀 동료였던 이청용(27·크리스탈팰리스)·고요한(27·서울)·고명진(27·알 라이안)의 그늘에 가려 있었다. 그해 7월 29일 전남과의 리그컵 경기 교체명단에 포함됐던 기성용은 열심히 몸을 풀었다. 이미 서울의 리그컵 우승이 확정돼 승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벤치 멤버들도 뛸 기회를 얻었다. 한 명 한 명 차례로 이름이 불렸지만 끝내 기성용의 이름은 들리지 않았다. 충격을 받은 기성용은 아버지(기영옥 현 광주FC 단장)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고 울면서 말했다.

 그로부터 9년이 흘렀다. 기성용은 27일(한국시간) 영국 웨일스 리버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웨스트브로미치와 2015-16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18라운드에서 전반 9분 결승골을 터뜨려 1-0 승리를 이끌었다. 지난 시즌 기성용은 아시아 선수 한 시즌 최다골(8골)을 터뜨렸고, 스완지시티의 ‘올해의 선수’에 선정됐다. 지난 여름엔 잉글랜드 아스널과 이탈리아 유벤투스 등 명문클럽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기성용은 스완지시티와 4년 계약을 맺고 의리를 지켰다. 이번 시즌에도 주전 미드필더로 나섰지만 컵 대회 포함해 18경기에서 골을 넣지 못했다. 스완지시티는 지난주까지 2개월 동안 7경기 연속 무승(2무5패)에 그쳤다. 결국 지난 10일 게리 몽크(36) 감독이 경질됐다. 같은 날 영국 신문 가디언은 ‘기성용의 뛰어난 활약을 더 이상 볼 수 없다’고 기성용에게도 화살을 돌렸다. 기성용은 지난 22일 “팀이 18위에 그치고 있다. 나 자신에게 화가난다”며 자책했다.

 위기에서 기성용의 한 방이 터졌다. 전반 9분 스완지시티 앙헬 랑엘이 때린 중거리슛이 골 포스트를 맞고 흘러나오자 기성용이 쏜살같이 달려들어 볼을 골문 안쪽으로 차넣었다. 집념이 만들어낸 골이었다. 83일 만에 승리한 스완지시티는 강등권인 18위에서 16위(4승6무8패)로 올라섰다. 기성용은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아름다운 골은 아니지만 내겐 의미있는 골”이라고 말했다.

 기성용은 지난 2009년 거칠기로 유명한 스코틀랜드 리그의 셀틱FC에 입단했다. 닐 레넌 당시 셀틱 감독은 기성용에게 주전자리를 약속했지만 말을 바꿔 기회를 주지 않았다. 부친 기영옥 단장은 27일 “당시 성용이가 두 차례나 감독 면담을 요청해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강하게 어필했다. 그리고 열심히 수비력을 키웠고 결국 주전을 꿰찼다”고 말했다.

 2012년 이적료 600만 파운드(약 104억원)에 스완지시티로 이적한 기성용은 거친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기 단장은 “성용이가 과거엔 볼을 예쁘게 찼다. 하지만 영국 축구는 압박이 심하기 때문에 독해져야 했다. 성용이가 수비 때는 포백을 지원하고, 공격을 할 때는 과감하게 상대 진영에 침투하고 있다”고 말했다.

 20대 초반의 기성용은 천방지축이었다. 2013년 7월 소셜미디어에 대표팀 감독을 조롱한 게 알려져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2013년 배우 한혜진(34)씨와 결혼하고, 지난 9월13일 딸 시온이를 얻은 뒤 그라운드에서도 한층 성숙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기성용은 이날 엄지손가락을 입에 무는 젖병 세리머니를 펼쳤다. 기영옥 단장은 “성용이가 책임질 가족이 두 명(아내, 아이)으로 늘었다. 26일 시온이 백일을 맞아 한국에서 며느리·손녀와 함께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성용이가 ‘아이 백일에 맞춰 골을 넣고, 팀도 이겨서 기쁘다’고 하더라”며 웃었다. 축구팬들은 “기성용이 ‘분유 파워’까지 장착하면서 더욱 강해졌다”고 말했다. 아이 분유값을 벌기 위해 더 열심히 뛴다는 의미다.

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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