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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열로 세탁기 돌린다 … 가전시장 화두는 신재생 에너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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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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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116년이 된 독일 가전기업 밀레의 라인하르트 진칸 회장은 미래 가전시장에 대해 “물과 에너지 등의 천연자원을 적게 쓰는 가전이 필수인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태양열 같은 신재생 에너지를 쓰는 가전이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다. [사진 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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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인터넷(IoT) 기술을 적용한 밀레의 세제 자동투입 세탁기. 세계 최초다. 스마트폰으로 ‘세제 부족’ 상태를 알려주고 자동주문도 된다. [사진 밀레]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열풍이 독일 동북부 작은 시골마을인 헤르츠블록에 불어닥친 건 1899년의 일이었다. 이 마을의 혈기왕성한 서른 살 청년 칼 밀레는 새 기술과 문물에 푹 빠져있었다. 손재주까지 있어 우유에서 버터크림을 분리해내는 분리기를 고안했다. 하지만 이를 내다팔 수완이 부족했다. 말주변도 좋고 숫자에 능한 동갑내기 청년 라인하르트 진칸이 팔을 걷어부쳤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회사를 세웠다. 요샛말로 ‘청년창업’인 셈이었다. 기술 개발은 칼 밀레가, 영업과 재무같은 살림살이는 라인하르트 진칸이 맡았다. 크림분리기는 당시만해도 소 5마리 값으로 고가(高價)였지만 두 사람은 가격을 내리지 않았다. 첫 제품이 팔린 건 그로부터 2년 6개월이란 시간이 지난 뒤였다. 이런 뚝심의 청년 2명이 세운 회사는 한 해 매출이 35억 유로(약 4조5000억원)에 이르는 독일을 대표하는 가전기업이자, 세계 명품 가전회사로 성장했다. 올해로 116세가 된 장수기업 밀레의 이야기다. 본사는 독일 귀터슬로에 있다.

글로벌 혁신 기업인, 미래 50년을 말하다 <20·끝> 라인하르트 진칸 밀레 회장
프리미엄 제품 개인맞춤형 진화
잘나가는 회사들 50년 뒤엔 재편
사내 건강보험제도·경영대학 도입
직원 존중, 용기 북돋아줘야 리더

 밀레는 지난 2005년 국내에 첫 진출하며 세탁기·냉장고와 같은 프리미엄 빌트인 가전제품을 서울 강남의 ‘타워팰리스’에 공급하며 명품 브랜드 이미지를 쌓기 시작했다. 가격은 국내 가전제품 보다 2~3배 비싸고 디자인은 심플하지만 기술력이 좋아 튼튼하다는 강점이 입소문을 탔다. 국내 제품보다 2배 비싼 밀레의 진공청소기는 주문이 몰리면서 비행기로 제품을 공수해오다보니 ‘비행기 청소기’란 별칭마저 얻었다.

 밀레의 공동 회장이자 창업주 4세인 라인하르트 진칸(59) 회장은 e메일 인터뷰에서 “태양열처럼 신재생 에너지로 작동하는 가전”을 미래 가전 시장의 화두로 꼽았다. 스마트 그리드(지능형 전력망)를 이용해 집 외부에 집열판 설치하고 그를 통해 태양열 에너지를 공급받는 식이다.

 진칸 회장은 “자원은 제한돼 있는데 인구는 계속 늘어나니 물과 에너지 등의 천연자원을 적게 쓰는 가전이 필수적인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며 “2020년이면 신재생에너지를 이용하는 스마트 가전제품 보급률이 80%를 넘어서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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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칸 회장은 “값은 비싸도 수십년을 거뜬히 쓰는 명품 브랜드로서 생존하기 위해선 ‘가치 사슬의 재정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밀레가 최근 세계 최초로 내놓은 세제가 자동으로 투입되는 스마트 세탁기를 예로 들었다. 이 제품은 인터넷과 연결돼 세제가 떨어지면 자동으로 사용자에게 세제 부족상태를 알려준다. 스마트폰으로 알림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세제를 자동주문해 주는 기능도 부가돼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IT(정보기술) 업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사물인터넷(IoT)’기술을 활용했다.

 진칸 회장은 “프리미엄 가전에 대한 소비자들의 기대감은 성능과 디자인에 있어 점차 개인맞춤형으로 진화하게 되면서 가치 창조의 사슬이 재정의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변화에 맞춰 제조업도 크게 변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진칸 회장은 “생산과정은 사물인터넷과 소비자를 완제품으로 포함시키는 생산시스템으로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며 “3D(3차원) 프린팅 기술의 도입으로 플라스틱으로 만드는 제품들의 상당한 진전이 있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또 “오늘날 성공적인 회사들 중 대다수가 50년 뒤엔 새롭게 재편되는 가치사슬의 변화로 사라질 것”이라며 “각각의 회사들은 이런 변화를 인식하고 그에 맞게 적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조언했다.

 세계 1위와 같은 성공을 거뒀을지라도 안심하긴 어렵단 것이다. 그는 노키아를 예로 들었다. “한때 부츠를 만들던 노키아는 세계를 선도하는 휴대폰 제조사로 성장했지만 결국 삼성전자와 애플에 세계 시장을 내준 것이 그 사례”라고 했다.

 그는 또 “디지털 사진 기술이 도래하고 난 이후 전통적 사진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아그파에 대한 관심이 빠르게 사라졌다”며 “이런 변화에 맞게 후지필름은 의료영상 등 새로운 인쇄사업의 사업영역을 발굴해 생존했다”고 덧붙였다.

 진칸 회장은 “기업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중요하다”면서 “밀레는 실적 중심으로 생각하기 보다 ‘세대’의 관점에서 생각하려 노력한다”고 전했다. 밀레와 진칸이란 두 가문이 100% 지분을 보유한 ‘가족기업’으로 116년을 이어지는 비결로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하는 ‘장기 비전’을 꼽은 것이다. 그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발명은 아이들이 부모세대로부터 기술을 습득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놨다”며 “기술을 의미있게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인류에게 미래가 있다”고 덧붙였다.

 진칸 회장이 생각하는 훌륭한 경영자는 어떤 사람일까. 그는 ‘경쟁력 있는 강점이 없다면 사업을 할 이유가 없다’는 보스턴컨설팅의 창립자인 브루스 헨더슨의 말을 인용했다. 훌륭한 기업인으로서의 첫번째 조건은 ‘회사를 이끌어갈 수 있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라는 것이다. 조직을 이끌어가는 리더로서의 자격도 언급했다.

 진칸 회장은 “훌륭한 기업인은 임직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사람이지만 무모한 사람이어선 안 된다”며 “신중하되 질질 끌지 않고, 열정을 갖되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116년의 장수기업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다. 진칸 회장은 ‘직원’을 꼽았다. 밀레는 회사 설립 후 20년이 지난 1909년 건강보험제도를 도입했다. “가족기업으로서의 장점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밀레는 1대 1 방식의 ‘도제시스템’을 운영한다. 한 번 입사하면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근무하는 직원들의 ‘경험’을 존중해서다. 사내 경영대학을 통해 석사학위 과정까지 공부할 수 있게 하고 오래 근무한 직원들을 축하해주기도 한다. 20년 이상 밀레에서 근무한 직원은 1만 명에 넘는다. 전체 직원 수가 1만3000명이란 점을 감안하면 대다수 직원들이 한 직장을 고수하고 있단 뜻이기도 하다. 진칸 회장은 “100년이 넘는 시간 직원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존중해왔다”며 “여성 관리자 비율을 높이고 자녀가 있는 직원이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116년이 넘는 시간 동안 두 가문이 함께 경영하면서 갈등이 없었던 것은 무엇보다 두 가족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회사 운영에 필요한 중요 사안은 투표를 통해 결정하는데 반드시 60%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는 “한 가문이 다른 가문을 간단히 이길 수 없는 구조로 회사의 이익금 분배와 투자, 가족들의 의무사항을 다루고 있는 규정들을 계약사항으로 묶어 고객의 기대를 충족시키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 자동차 시장에 큰 충격을 줬던 폴크스바겐의 배기량 조작사건에 대한 생각도 전했다. 진칸 회장은 “이 사건으로 ‘독일산(Made in Germany)’에 대한 명성에 금이 갈 것이라고 보진 않지만 배기 가스 조작은 정말 실망스럽고 절대 정당화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독일 제품의 뛰어난 품질과 기술, 신뢰할 수 있는 사업관행을 유지하는 수 천 개의 독일 기업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며 “폴크스바겐 사건이 이런 독일산 이미지에 근본적인 손상을 가져오진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ag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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