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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 2035

‘힘내’라는 말 이제 보이콧해도 될까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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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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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미
JTBC 사회부 기자

 결혼에 대한 내 로망은 좀 특별했다. “난 바라는 거 없어. 힘든 일은 꼭 함께 이겨내자.” 차라리 로망이 함께 장보기나 취미활동 같은 거였다면 나았을지 모른다. 이건 마치 “내 이상형은 좋은 사람”이라는 미혼 남녀의 소개팅 주문 같았다. 우리는 새로운 생활과 회사 일로 지친 각자의 하루를 어떻게 함께 이겨내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했다.

 “힘내.” 다른 위로는 떠오르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힘내”를 주고받았다. 그때 나는 힘내라는 말이 가진 뚜렷한 한계를 깨우쳤다. 딱히 그 다음에 이어질 만한 말이 없다는 거였다. “힘내”라는 말에 “무슨 수로?”라는 대답은 어울리지 않았다. “너도” 또는 “그래, 파이팅” 정도가 그나마 자연스러웠다. “밥 한번 먹자”라는 말에 “언제?”라고 되물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결혼한 지 석 달쯤 지났을까. “앞으로 우리끼리 힘내라는 말은 하지 말자.” 나는 보이콧을 선언했다. “힘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아. 이미 한껏 힘을 내고 있는데…. 도움이 하나도 안 된다고!” 그러고는 소파에 쭈그려 앉아 엉엉 울었다. ‘돈 내라는 말보다 싫은 말이 힘내’라는 노랫말을 만든 타블로는 천재가 확실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시트콤이지만 그땐 슬펐다.

 2년 전 울던 나를 다시 떠올린 건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서울대생의 유서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우울증으로 괴로워할 때 근거도 없는 다 잘될 거야 식의 위로는 독입니다.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기억해 주세요.’ 그에겐 대체 무슨 말이 필요했던 걸까. 그의 유서를 몇 번 더 곱씹었다. ‘힘들 때 전화해, 우리 가까이 살잖아. ** 누나의 이 한마디로 전 몇 개월을 버텼습니다.’

 돌이켜보면 내 해결책도 비슷했다. 한밤중에 퇴근하는 남편에게는 “딸기주스 마실래?”라는 말을, 취업이 안 돼 죽겠다는 후배에겐 “취업해도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는 말을 전했다. 의미도 재미도 없는 얘기들이지만 예전보다는 나아졌다. 나는 딸기주스 한 잔이 불러오는 배 속 든든함이, 진심이 담긴 독한 조언이 가져오는 위로를 믿는다.

 요즘 빠져 있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 큰 국제대회를 앞두고 있는 택이가 덕선이에게 묻는다. “나 져도 돼?” 덕선이가 웃는다. “응, 져도 돼.” 이 드라마에서도 힘내라는 말보다 “라면을 먹자”거나 “같이 가자”는 말이 더 흔하다. 새해엔 힘내라는 ‘헤픈 엔딩’은 잠시 보이콧해 보는 것도 좋겠다. 찾아보면 그거 말고도 할 수 있는 말과 일이 많다.

김혜미 JTBC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