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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재현의 시시각각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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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현
박재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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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현
논설위원

올해 한밭대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한 안상진씨의 투쟁 목표는 취업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방대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낀 한 해였다”고 말했다. 이달 초 회장직에서 물러났지만 학생 대표 자격으로 며칠 전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를 만났다. 청년 실업, 특히 지방대 학생들의 취업을 위해 대책 마련을 호소했다.

경제적 불평등에 방황하는 청춘들
지질한 허세 대신 공감으로 대해야

 “나라에 피를 바칠 테니 피땀 흘려 일할 일터를 주세요.” 거친 표현만큼 절박했다. 이 학교 취업률은 50% 정도다. 하지만 아르바이트, 인턴직 등이 포함돼 있어 정상적인 취업률로 보기 어렵다고 한다.

 취업을 위한 대전 지역 6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의 싸움은 4월부터 시작됐다. 먼저 헌혈 캠페인에 들어갔다. 청년들의 피를 모아 정부에 호소하자는 취지였다. “젊은이들의 피와 땀이 국가의 중심”이라고 명분을 만들었다. 방학 때는 땀을 모은다는 의미에서 국토대장정도 했다. 하지만 과격한 구호에도 정부와 기업은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지난달 다시 2차 헌혈운동을 벌였다. “우리의 피와 땀이 식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거듭 머리를 조아렸다. 고용노동부 주선으로 기업들과의 매칭이 있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이들에게 취업은 생존 그 자체였다. “영원히 흙수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란 체념에 대한 저항이다. 이들의 삶을 빗대 ‘성실한 나라의 엘리스’란 허무한 비유가 나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아니라…. 여러 개의 자격증을 따고 스펙도 갖췄지만 취업의 장애물을 넘지 못하고 겪게 되는 경험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대입시킨 것이다.

 청춘의 방황이 서울이라고 다르겠나.

 청각장애아동을 돕던 20대 여성 언어치료사가 영양실조로 고시원에서 쓸쓸히 숨진 사건은 비극 그 자체다. 그는 휴대전화비도 내지 못하고 밀린 고시원 월세 100만원을 이승의 빚으로 남기고 떠났다. “정신적 귀족이 되고 싶었지만 생존을 결정하는 건 수저 색깔이었다”란 유서를 남긴 서울대 학생의 자살 사건도 그렇다. “먼저 태어난 자, 가진 자, 힘 있는 자의 논리에 굴복하는 것이 이 사회의 합리”라는 대목에 기성세대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

  혹시 나도 “노~오력이 부족하다”며 헬조선과 수저론을 읊조리던 이들을 채근하지 않았을까. 영화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에서 수습사원을 족치는 신문사 부장처럼. “출근은 있어도 퇴근은 없고 너희들의 생각·주장·느낌은 다 필요 없다”고 등을 떠밀며 거리로 내쫓지는 않았는지.

 최근 법무부의 느닷없는 ‘사법시험 폐지 유예’ 발표 때문에 로스쿨 학생들과 사시 준비생들을 접촉할 기회가 있었다. 이들과의 대화에서 확인한 건 기성세대, 특히 86세대들에 대한 강한 불신이었다. 과거 참신한 젊은 피의 상징이었던 386세대가 노회하고 꼰대를 상징하는 86세대로 불리고 있었다.

 한 서울대 로스쿨생의 얘기. “1980년대 민주화 투쟁은 인정한다. 하지만 86세대는 받는 데만 익숙했다. 당시 경제호황에 힘입어 아무 스펙도 없으면서 쉽게 취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 지금의 사회다.”

 이들은 현재의 리더십으로는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 곳곳에 퍼진 불신의 벽을 깰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다만 기성세대에게 바라는 것은 ‘공감’이었다.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입사 시험을 보고 면접비를 받아 막걸리까지 사먹었다”는 허세가 아니라 같이 아파해주는 시늉이라도 해 달라는 것이다. “아빠 노릇 처음이라서 잘 몰랐다”는 말로 대충 얼버무리지 말라는 얘기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은 ‘시(詩)를 측정하는 방법’을 설명한 서문을 가리키며 학생들에게 “찢어버려라(rip it out)”고 외친다. 이제 우리도 그 얄팍한 스펙을 찢어버리는 것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거리에는 ‘응답하라 1988’의 삽입곡이 크리스마스 캐럴과 함께 흘러나오고 있다.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박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