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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골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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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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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
문화부장

서울 경복궁 서쪽 일대인 서촌에서 약속 있는 날은 그 자체로 기분이 좋다. 통인시장 골목을 지나 올망졸망한 가게들이 붙어 있는 서촌 길을 걷다 보면 마치 서울 아닌 낯선 곳에 와 있는 느낌마저 든다. 1938년에 지어진 박노수 화백의 생가를 개조한 박노수미술관 앞에서는 갈 때마다 “참 좋다” 탄성이 나온다. 개인적인 취향 탓도 있다. 어려서부터 미로 같은 골목이 좋았다. 여행을 가서도 늘 대로보다 골목을 뒤지는 데 열을 냈다. 골목은 단어도 참 예쁘다. 아니 참 ‘골목스럽다’. 소리와 그 뜻이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다. 뭔가 아련한 정서가 있다.

 요즘 한창 인기 있는 TV 드라마 ‘응답하라1988’도 ‘골목’에 대한 얘기다. 아파트가 보편적 주거공간이 되면서 사라져 버린 서민 동네 골목길의 정서를 고스란히 재현했다. 그 시절에는 한 골목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식구였다. 골목이 있고, 우리 동네가 있고, 이웃사촌이 있었다. 80년대 운동권에 대한 허술한 묘사 등 허점에도 눈감게 되는 이유다.

 서촌의 골목길을 쭉 따라 걷다 보면 만나지는 가게 이름들도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누하식당이 있고 그 옆에 누상어린이집이 있다. 함께 간 영화감독은 원래 서촌엔 5개의 동네가 있었다고 했다. 통인동·옥인동·누상동·누하동·체부동이다. 물론 지금은 없다. 지금은 모두 자하문로다. 알다시피 ‘도로명 주소’ 때문이다. 누군가 한 인터뷰에서 “서울에서 제일 싫은 것”으로 도로명 주소를 꼽았던데, 동감이다.

 올 베니스비엔날레 미술전에서 은사자상을 받은 임흥순 감독의 다큐멘터리 ‘위로공단’을 보다가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지난 70년대 한국 경제개발을 이끈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돌아보는 다큐다. 감독의 어머니가 당시 구로공단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시다(보조노동자)’였다. 카메라가 40년 전 회사들이 있던 구로구 일대를 훑는데, 도로표지판이 ‘디지털로’ ‘남부순환로’다. 70년대 한국 사회와 한국 여성의 상징이었던 구로동·가리봉동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안 그래도 내 삶엔 골목이 사라졌다. 골목길에 접어들면 무엇이 있을까 막연히 설레던 청춘도 사라졌다. 그리고 동네 이름이 바뀌었다. 아예 동네가 사라졌다. 주소지 변경 이유가 아직도 잘 납득되지 않는 나는 매번 인터넷 검색으로 내가 사는 곳을 확인한다. 참을성도 없는 편이라 그때마다 짜증이 치민다. 아마도 쉽게 새 주소를 외우지 못할 것 같다.

양성희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