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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를 흔들 시 한 줄

최정례 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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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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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 황제다

달콤한 아이스크림의 역설
모든 건 덧없이 녹아내리니

(원문 The only emperor is the emperor of ice-cream)

- 월리스 스티븐스(1879~1955), ‘아이스크림 황제’ 중에서

이 한 줄은 시 ‘아이스크림 황제(The Emperor of Ice-cream)’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필자가 오랫동안 매료됐던 구절이다. 미국 시를 한 차원 올려놨다는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도 자신의 시 중에서 이 시를 가장 선호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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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의 정황, 부엌에선 아이스크림이 만들어지고, 침실엔 시체가 누워 있다. 죽은 여자는 자신이 화려하게 수놓았던 시트로 얼굴이 덮여 있으나 딱딱한 발이 시트 밖으로 삐져나온다. 그것이 얼마나 차갑고 무감각한지 보여주기 위해서란다. 우리 앞에 놓인 죽음은 그 무엇으로 가릴 수도, 장식될 수도 없다는 뜻일 것이다. 아이스크림은 달콤하나 순간 녹아버린다는 점에서 우리 삶과 닮아 있다. 얼음 디저트라는 점에서는 시체의 차가움을 은유한다.

 시인은 달콤한 기쁨을 주다 덧없이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이야말로 절대적인 황제라 한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은 덧없고 덧없다. 그중 최고로 덧없는 모습은 아이스크림의 거품이다. 뭉게구름 같은 그것이 덧없음의 황제 아이스크림 황제다. 이 허무주의적 진실을 이렇게 한 줄로 꿰뚫어 요약하다니, 이 구절이야말로 시의 엑스터시로서 우리를 녹아내리게 하는 아름다움 아닌가.

  최정례 시인·2015 미당문학상 수상자

[전문]

아이스크림 황제
월리스 스티븐스 /최정례 졸역

여송연 굵게 마는 자를 불러라
근육질의 사내로, 그리고 그로 하여금
부엌의 컵에 욕정적인 응유를 휘젓게 하라
계집들은 늘 입던 옷 그대로 입고
빈둥거리게 하라 그리고 남자애들은
달지난 신문에 꽃을 싸서 가져오게 하라
실재로 하여금 최후의 모습이 되게 하라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 황제다

유리 손잡이가 세 개나 떨어져 나간
전나무 경대에서 그녀가 한때
부채꼬리딱새를 수놓았던 그 시트를 꺼내라
그녀의 얼굴이 잘 덮이도록 펼쳐라
만약 굳어버린 발이 삐져나온다면, 그건
그녀가 얼마나 차가운지 얼마나 무감각한지 보이기 위한 거다
램프로 하여금 빛줄기를 첨부하게 하라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 황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