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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금강산 관광과 2조6163억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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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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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혹시나 돌파구가 마련될까 기대했지만 역시나 결렬로 끝나고 말았다. 12월 11일 개성에서 열린 남북 차관급 회담을 지켜본 소회다. 이제 당분간 남북관계는 경색 국면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다음달 시작되는 한·미 연합군사훈련과 4월 총선 정국을 감안하면 남이나 북 모두 당국자 대화에 여유를 갖고 임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협상은 주고받는 교환이 전제
기계적 상호주의론 타결 어려워
금강산 현금이 핵·미사일 개발에
전용 안 되게 우회 조치 마련하고
‘원칙의 승리’란 강박관념 벗어나
실리 추구하는 대북정책 펼 때다

 결렬의 이유는 남북 간 의제 조율 실패인 것으로 전해졌다. 우리 측은 이산가족 문제의 근본적 해결, 환경·민생·문화 등 3대 통로 개설, 비무장지대(DMZ) 세계생태평화공원 조성, 개성공단 3통(통행·통신·통관) 등을 우선적 의제로 제기한 반면, 북측은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를 핵심 의제로 들고 나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은 17일 관훈토론회에서 "원칙까지 훼손하며 이산가족과 금강산 관광을 맞교환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결렬의 배경을 밝힌 바 있다. 2013년 개성공단 폐쇄 당시 ‘원칙의 승리’를 경험했다고 믿고 있고 8·25 합의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있는 우리 정부로서는 다른 선택을 고민할 개연성이 극히 적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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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평화롭고 풍요로운, 행복한 한반도’라는 대승적 목표의 큰 틀에서 놓고 보면 보다 유연한 협상 태도도 가능한 것 아닌가 한다. 대북 협상원칙이라는 것도 엄밀히 말해 큰 국가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모든 협상은 기본적으로 주고받는 교환을 전제로 한다. 한쪽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거나 ‘등가성, 즉시성, 동종성’을 강조하는 기계적 상호주의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워진다. 예컨대 8·25 합의에서 나름의 성과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도 북측의 명시적 사과 없이도 우리 정부가 합의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건 원칙이 아니라 유연성의 발로다.

 우리가 선결조건으로 제시했던 진상 규명, 재발 방지, 신변안전 조치의 제도화, 그리고 사업자의 독점권 보호만 해도 그렇다. 북측은 이명박 정부 이래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 측의 요구를 수용할 뜻을 밝힌 적이 있다. 김정일 위원장이 생전에 약속한 사안을 자신들이 어떻게 지키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게 그 요지였다. 뒤집어 보면 북측 요구대로 관광 재개를 일단 합의문에 포함시킨 뒤 선결조건 해결을 위한 후속 실무회담을 개최해 풀어 가면 접점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실무회담 과정에서 북측이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면 그때 얼마든지 충분한 명분을 갖고 판을 깰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상황을 꼼꼼히 복기해 보면 우리 정부가 금강산 관광 재개를 꺼리는 가장 큰 이유는 절차 문제가 아니라 금강산 관광을 통해 북에 흘러 들어간 현금이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전용돼 부메랑 효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우회로는 있다. 협상을 통해 금강산 사업으로 유입된 현금이 핵이나 미사일 개발에 전용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게 만들면 될 것 아닌가. 한국 정부가 강력한 정치적 의지를 보일 경우 유엔 안보리나 미국도 이를 반대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금강산 관광 재개는 남북 간 신뢰 구축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우리 주도로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다. 더구나 북한으로서는 개성공단은 되고 금강산 관광은 안 된다는 이중 기준 자체를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실리로만 따져도 금강산 관광 재개는 우리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무엇보다 이산가족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여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 나아가 박근혜 대통령이 제안했던 환경·민생·문화 등 3대 통로 개설과 DMZ 세계생태평화공원 조성, 그리고 개성공단 3통 문제를 포함한 남북관계 개선에도 긍정적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 하나는 금강산 관광 중단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우리 기업인들과 고성 지역 주민들이다. 남북교역투자협의회에 따르면 7년 이상 이어진 중단 사태로 관련 업체들이 투자 손실 8213억원, 매출 손실 1조7950억원, 도합 2조6163억원이라는 천문학적 손실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사업 주체인 현대아산과 49개 협력업체는 파산 직전에 내몰려 있고 인근 지역 주민들의 시름은 깊어만 가고 있다.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고용창출과 국민경제 활성화라는 또 다른 목표를 위해서라도 금강산 관광 재개를 마냥 외면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제 ‘원칙의 승리’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실리 추구의 대북정책을 펴야 할 때다. 금강산 관광 재개는 분명 이에 부응해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 준비의 마중물이 될 것이다. 박 대통령의 담대하고 용기 있는 결단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하겠다.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