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노트북을 열며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중앙일보

입력 2015.12.16 01:15

업데이트 2015.12.16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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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조강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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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수
사회2부장

“살려주세요.”

 처음엔 내 귀를 의심했다. 자존심 강한 그 친구 입에서 툭 튀어나올 ‘말’이 아니었다. 그것도 처음 보는 나의 회사 동료에게 앞뒤 가리지 않고 철퍼덕 무릎부터 꿇은 형국이었다. 무척 큰일을 겪고 있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1년여 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에 비해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어림짐작으로 전 육체의 30% 정도는 그에게서 빠져나간 듯했다. 육체가 저 정도이니 속은 얼마나 썩었을까 하는 마음으로 친구의 얘기를 경청했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벤처 열풍의 한가운데 있었던 ‘벤처 1세대’ 친구의 사연은 이랬다.

 친구는 1999년 ‘주소일괄변경 서비스’를 개발했다. 짚코드라는 회사를 차린 뒤 ‘KT무빙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용자가 본인 인증하고 서비스를 신청만 하면 금융·통신·유통사들에 등재된 주소를 한꺼번에 변경해주는 게 골자다. 일반 국민에겐 공짜로 제공하는 대신 기업이나 금융권 회사에서 건당 100~200원씩 받아 시설 유지비로 썼다. 우정사업본부, 행정안전부 등 정부 부처들과도 주소변경서비스 업무협약 등을 맺었다. 2013년 11월 기준 시중은행·생명보험사·손해보험사 등 60여 개 금융기관과 서비스 제휴를 맺었다.

 잘나가던 사업은 지난 6월 대형 암초를 만났다. 금융감독원이 당시 ‘국민체감 20대 금융관행 개혁과제’를 발표하면서였다. 그중 17번째에 ‘금융거래 수반 주소 일괄변경 시스템 구축’이 들어 있었다.

 이 서비스는 내년 1월 15일부터 시작된다. 금감원은 “참여 대상이 금융기관에 한정돼 짚코드의 민간사업영역과 기술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짚코드는 “금융기관 감독기관인 금감원과 민간 사업자 간에 공정한 게임의 룰이 적용될 리 만무하다”며 “벌써 여러 금융기관이 재계약을 해지한 상태”라고 했다.

 16년 동안 공익적 사업을 일궈왔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경험을 처음 했다는 친구는 두어 달 전 금감원을 직접 찾아갔다.

 ▶친구=민간기업이 16년간 해온 사업을 금감원이 갑자기 하면 우린 망합니다.

 ▶담당 국장=청와대에 보고했기 때문에 안 됩니다.

 ▶친구=이 사업 평생 책임지고 갈 겁니까.

 ▶국장=….

 다급한 마음에 친구는 담당 국장에게 “가족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단다. 아무 답이 없어 “이 일로 누군가 죽을 수도 있다”고 하자 퉁명스럽게 “다른 걸 찾아 보세요”라고 하더란다.

 친구는 금감원이 민간기업 사업임을 모르고 추진했을 리 없다고 확신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허구한 날 중소기업과 상생하라, 창조경제 하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데 금융감독기관이 멀쩡한 민간기업의 영역을 빼앗아 사형선고를 내려도 되는 것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금감원이 이 사업을 추진하는 명분은 좋다. 그렇더라도 민간기업의 사업을 그대로 카피한 것이라면 창조경제에 역행하는 것이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조강수 사회2부장

모비온

Innovation 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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