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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졸업한 두 딸, 의롭게 살아라 아버지 뜻 이어 안정된 삶 박차고 NGO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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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소장(왼쪽에서 세번째)과 그의 장녀 유현씨(오른쪽), 차녀 미형씨, 그리고 유현씨의 딸 조현경양이 지난 13일 오전 공원을 산책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하버드 졸업한 두 딸
의롭게 살아라 아버지 뜻 이어
안정된 삶 박차고 NGO행

아버지는 고대 이집트의 핍박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구한 ‘모세’ 이야기를 자주 했다. 자녀을 위한 기도에는 언제나 “나라를 위하고, 의로움을 좇으며 용감한 아이로 크거라”라는 바람을 더했다. 디지털 환경 운동을 펼치는 시민사회단체 ‘인폴루션 ZERO’의 박유현(40) 대표와 그의 동생 박미형(38) 국제이주기구(IOM) 서울사무소장, 그리고 아버지 박은태(77) 인구문제연구소 소장 얘기다. 두 딸은 아버지에 대해 “옳다고 생각한 일이라면 어떤 역경이 와도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다”고 말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두 딸은 자신들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할머니는 40년대 일본서 한국인 노동자 도와
아들에게 ‘모세’ 이야기 “의롭게 살아라”
아버지가 된 아들도 자녀에게 같은 내용 기도

하버드 가는 딸에게 “돌아와 한국 위해 일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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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태 소장과 어린 시절의 자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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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고(故) 하해순씨와 어린 시절 네 손주.

“유학 끝나고 미국에 눌러 앉을 생각 말아라. 국비장학생으로 나라 돈 받고 유학을 갔으면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국 학계를 위해 일해야 한다.”

아버지는 2시간 동안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장녀 유현씨가 1999년 하버드대 바이오통계학 박사 과정 유학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유현씨는 “아휴 말도 마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였다니까요”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런데 얼굴엔 미소가 번져있다. 이제서야 아버지 박 소장의 그 말뜻을 이해한다는 표정이다.

유현씨는 2011년부터 디지털 환경 운동을 하는 시민단체인 ‘인폴루션 ZERO’를 이끌고 있다. ‘인폴루션’(infollution)은 인포메이션(information·정보)과 폴루션(pollution·공해)의 합성어로 성인 음란물, 폭력 게임, 사이버 폭력, 악성 댓글(악플) 등 인터넷상의 유해한 정보를 말한다. ‘인폴루션 ZERO’는 어린이들에게 올바른 디지털 사용법을 교육하고 인터넷상의 유해 정보를 없애기 위한 사회운동을 펼치고 있다. 유현씨는 올해 세계경제포럼이 선정한 영글로벌 리더에 선정되는 등 혁신적인 사회적 기업가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사회운동의 교육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교육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

유현씨가 원래부터 비정부 기구(NGO) 활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하버드대 유학을 마치고 들어간 곳은 세계적인 경영컨설팅사인 보스턴컨설팅그룹이었다. 좋은 학벌과 든든한 직장은 그에게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주는 듯 했다. 그러다 2008년 8세 초등학생을 성폭행한 조두순 사건을 접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 느낌이었어요. 사건의 잔인함뿐 아니라 해당 사건을 다룬 기사 하단에 음란물 광고가 실린 것을 보고 더 충격을 받았죠.”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뭔가를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두려웠다. “원래의 저는 투사 같은 성격이 아니에요. 내가 할 수 있을까, 해도 될까란 걱정에 많이 망설였어요. 의롭고 용감하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평소 당부가 없었다면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을 거에요.”

5년 동안의 보스턴컨설팅 회사 생활을 정리하고 ‘인폴루션 ZERO’를 시작했다. 단체를 설립한 후엔 프로그램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구두가 닳도록 기업체와 정부 관계자를 쫓아다녔다. 한 정부 기관장의 스케줄 표를 구해서 3일 내내 따라다닌 적도 있었다. “불쑥불쑥 나타나니까 나중엔 귀신 보듯이 놀라더라고요. 결국 지원을 받는 데 성공했죠.” 

“네 선택이라면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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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열린 ‘2013 세계인구총회’에서 축하연설을 하고 있는 박은태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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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NGO 활동 중이던 박미형 소장.

차녀 미형씨는 2013년부터 국제이주기구(IOM) 서울사무소 소장을 맡고 있다. 국제 이주민과 난민들의 이주와 정착을 돕는다. 그 이전엔 5년 동안 아프리카의 20여 개 국을 돌며 에이즈 퇴치와 홍수·가뭄 같은 재난 발생시 지원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NGO에서 일했다.

아프리카 생활은 고생스러웠다. 말라리아와 풍토병에 걸려 열이 40도를 넘어간 적도 여러 번이었고, 50도가 넘는 폭염에 에어콘 없는 숙소에서 지내는 일도 많았다. 아버지의 편지는 그런 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한 힘이었다.

아버지는 편지를 자주 보내왔다. 편지 속엔 항상 “밥은 잘 먹니. 몸은 어떠니. 네가 자랑스럽다” 등 딸을 향한 사랑과 응원이 담겨 있었다. 매일 오전 십여 개의 신문을 읽고 딸의 활동과 관련된 기사가 있으면 e메일로 보내줬다. 미형씨는 “힘이 쭉 빠졌다가도 아버지의 편지를 읽고 나면 다시 힘이 났다”고 말했다.

미형씨는 학창 시절 첼로를 전공했다. 미국에서 예술고등학교를 다니다가 고3 때 전공을 작곡으로 바꿨다. 대학에선 정치행정학을 전공하고 하버드대에서 국제보건학으로 석사를 받은 후 귀국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그러다 NGO 활동을 위해 아프리카로 떠났다. 편하고 안전한 길 대신 어렵고 힘든 길을 택한 딸에게 아버지는 “네 선택이라면 믿겠다”고만 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그랬다. 2남2녀를 키우면서 자식의 등을 떠밀지도 그렇다고 잡아 끌지도 않았다. 그저 믿고 지켜봤다. 장남 원형(43)씨는 금융계에서 일하고 있고 막내아들 노훈(36)씨는 한 중견기업에서 근무 중이다.

박 소장이 생각하는 부모의 역할은 ‘자식이 고민 끝에 어떤 결정을 내렸을 때 자식을 믿고 기다려주는 것’이다. “세상 그 누군들 자신에게 딱 맞는 정답을 미리 알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고민하고 찾아낸 길이 바로 정답이죠.” 박 소장의 말이다.

아프리카로 NGO 활동 떠나는 둘째 딸에게
“네 뜻이 그렇다면 해보라”며 격려와 응원
“부와 명예보다 의로움과 용기가 더 중요하다”

할머니에게서 시작된 가르침, “의롭고 용감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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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유네스코 ITC 교육상을 수상한 뒤 프랑스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 본부에서 그간의 활동을 발표 중인 박유현 대표.

박 소장이 자녀들에게 해주던 ‘모세’ 이야기는 그가 어머니 고(故) 하해순(1901~85)씨로부터 들으며 자란 이야기였다. 어머니는 경남 진주 하씨 종손 집안의 넷째 딸로 태어나, 결혼 후 10남매를 낳았다. 10남매의 막내였던 박 소장은 세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어머니는 일본 야마구치 지역에서 여인숙을 했다. 돈을 벌기 위한 여인숙이 아니었다. “집에는 항상 옆 탄광에서 도망친 한국인 노동자가 한두 명씩 숨어 있었어요. 어머니는 그런 분들께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고 노잣돈도 건네곤 했어요.” 1940년대 일본에는 강제 징용으로 끌려간 한국인 노동자들이 많았다. 야마구치 탄광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도망치는 걸 돕기 위해 그곳으로 간 거였다.(※ 인터뷰 중에 나온 할머니 이야기에 유현씨와 미형씨는 “우리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흥미로워 했다. 미형씨는 “와~ 할머니도 국제 이주 관련 일을 했네. 할머니 DNA가 나한테 넘어왔나 보다”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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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소장 가족. 2남2녀와 손주까지 3대가 모였다.

45년 해방 후 돌아온 하씨는 개척 교회 세 곳을 짓고 평생을 종교 운동에 헌신했다. 어머니 하씨는 자녀들을 위해 매일 기도했다. “어머니는 항상 ‘나라를 위하고, 의로움을 알고, 용감한 아이로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매일 그 얘기를 들으며 자랐죠. 그보다 더 큰 가르침은 그 말을 실천하는 어머니의 삶 자체였고요.”

어머니는 아들에게 ‘부와 명예만을 좇아선 안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박 소장이 70년 프랑스 소르본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해외 유학이 흔치 않던 시절, 외국 박사 학위를 받고 온 그에게 대학·기업·연구소는 물론 청와대로부터까지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쏟아졌다. 어깨가 으쓱했다. 어머니 하씨는 그런 아들을 자랑스러워 하기는 커녕 호되게 꾸짖었다. “너는 강도보다 못한 놈이다. 강도가 비록 나쁜 마음을 품었지만 일을 할 때는 자기 목숨을 건다. 그런데 너는 좋은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왜 용기를 내지 않느냐. 부와 명예를 좇아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고 했다. 어머니의 따끔한 충고에 박 소장은 의기양양했던 자신의 모습을 반성했다.

후학 양성을 위해 5년 동안 단국대·연세대·카이스트 등에서 상경계열 교수로 일했다. 하지만 당시의 대학 교수 생활은 그가 생각하던 것과 달랐다. “당시엔 학생들 데모 막는 게 교수들의 일이었어요. 5년 동안 그러고 있으니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싶더라고요.”

그는 고민 끝에 대학 교수를 그만뒀다. 한국이 발전하기 위해선 경제 성장의 토대가 될 좋은 기업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각만 할 게 아니라 직접 해보자.’ 78년 무역업을 시작했다. 회사는 잘됐고, 돈도 많이 벌었다. 그 즈음 인구문제연구소에서 그를 찾아와 연구소를 맡아달라고 했다. 사무용 집기를 전당포에 맡겨야 할 정도로 재정 상태가 악화된 연구소였다. 박 소장은 “나라를 위하고 의로운 일을 하라”는 어머니의 당부가 떠올랐다. 그는 연구소의 재정 문제를 모두 해결하고 이사장을 맡아 지원했다.

기업가로 이름이 알려지면서 정부도 그를 불렀다. 82~84년 재무부 금융정책 자문위원을 지냈다. 84년엔 전국경제인연합회 상임이사를 맡기도 했다. 제14대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했다. 불미스러운 일을 겪으며 정치에서 손을 뗀 후엔 미국 브링험영대 초빙교수, 충남대 사회과학대 겸임교수 등으로 일했다. 그런 그의 가슴 한 켠엔 늘 어머니 말씀이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 같아 항상 부끄럽고 죄송스러웠어요.”

2001년 브라질 살바도르에서 열린 제24회 세계인구총회는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됐다. 브라질도 세계인구총회를 개최하는데, 왜 한국은 못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를 위해서 뭔가 해보자 결심했다. 하지만 한국은 인구학 분야에선 불모지나 다름 없었다. 박 소장은 2000년대 초반부터 국제인구과학연맹(IUSSP) 본부가 위치한 프랑스 파리를 12년 동안 매년 방문해 사무처를 직접 설득했다. IUSSP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다가 추운 겨울 프랑스 거리에서 대동맥 파열로 쓰러져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박 소장의 뚝심과 발품은 연맹을 움직였다. 그렇게 2013년 부산에서 전 세계 인구학자 수천 명이 모인 가운데 ‘2013 세계인구총회’를 개최했다.

이제 과거 어머니의 나이가 된 박 소장은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항상 이런 글귀를 덧붙인다. “부와 명예보다 의로움과 용기가 더 중요하단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이해득실을 따지지 말고 그것이 옳은 것인지를 먼저 따지거라. 그리고 용감하게 결단하거라.”

4대에 걸친 교육, “용렬하지 말고 담대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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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태 소장이 자식들과 손주들에게 쓴 편지. 어머니의 가르침대로“옳은 일 앞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용감하게 살아가라”는 당부를 담았다. 박 소장은 최근 수전증이 심해 손 편지를 쓰기 힘든 상태다. 박 소장이 내용을 불러주고 장녀 유현씨가 종이에 받아 적었다.

유현씨도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 아들 조현창(8)군과 딸 현경(6)양과 함께 싱가포르 난양공대 교수인 남편과 함께 싱가포르에서 살고 있다. 미형씨는 아직 미혼이다. 유현씨는 아이들에게 아버지와 할머니 이야기를 많이 들려준다. “용감하고 담대해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아직 어리지만 두 아이는 사려 깊고 따뜻한 심성을 지녔다. 박 소장은 그런 손주를 보고 있으면 흐뭇하다. 박 소장은 “공부는 언제든 자기 뜻을 세우면 할 수 있다”며 “따뜻하고 용감한 아이로 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현씨는 “아직은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것은 공부보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주저하지 않고 용감하게 결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부끄럽지 않게 살면 아이도 자연스럽게 옳은 일을 찾아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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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태 소장과 두 딸이 걸어온 길

아버지 박은태 1938년 경남 진주 출생, 56년 부산상고 졸업, 70년 프랑스 소르본대 경제학 박사 학위 취득, 70~75년 단국대·연세대·카이스트 교수, 76~89년 미주산업 대표이사, 78년~현재 인구문제연구소 이사장 겸 소장, 출판사 경연사 대표, 81년~현재 미국 아이젠하워 펠로우 회원, 82~84년 재무부 금융정책 자문위원, 85년 룩셈부르크 대공국 기사 작위, 90~92년 미국 하버드대 객원 교수, 92~96년 제14대 국회의원, 98~99년 미국 브링험영대 초빙교수, 2002~2003년 대한석유협회 회장, 2013년 제27회 세계인구총회 국가조직위원장, 프랑스 정부 국가 훈장 수상

 

장녀 박유현 1975년 서울 출생, 98년 서울대 계산통계학과 졸업, 2004년 하버드대 바이오통계학 박사 학위 취득, 2005~2010년 보스턴컨설팅그룹 근무, 2011~2013년 스웨덴 왕립 과학원 산하 ‘머레큐러 프런티어’(Molecular Frontiers) 아시아 지부장, 2011년 디지털 환경 운동 단체 ‘인폴루션 ZERO’설립, 2012년 유네스코 ICT 교육상 수상, 2013년 싱가포르 사회적 기업 ‘iZ HERO Lab’ 창업, 한국 제1회 아쇼카 펠로우 선정, 미국 아이젠하워 펠로우 선정, 유네스코 웬휘 교육 혁신상 수상, 2015년 세계경제포럼 ‘영글로벌 리더’ 선정

차녀 박미형 1977년 서울 출생, 99년 미국 스미스대 졸업, 2004년 하버드대 국제보건학 석사 학위 취득, 2005~2006년 보건사회연구원 주임연구원, 2007~2010년 국제 NGO 사마리탄스 퍼스(Samaritan’s Purse) 아프리카 지역 프로그램 개발 담당관, 2010년 옥스포드대 사회정책학 석사 학위 취득, 2010~2013년 국제 NGO 사마리탄스 퍼스 남아프리카·동남아시아 지역 프로그램 개발 및 평가 책임자, 2013년~현재 국제이주기구(IOM) 서울사무소 소장 

글=정현진 기자 Jeong.hyeonjin@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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