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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상무를 연기하며 심장이 쿵쾅거렸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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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내부자들’ 조우진

‘내부자들’(11월 19일 개봉, 우민호 감독)이 개봉 3주차까지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했다. 정치인과 재벌, 언론이 결탁해 우리 사회를 떡 주무르듯 하는 모습을 박력 넘치게 고발한 이 범죄 드라마는, 불꽃 튀는 연기(演技) 경연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연인 이병헌, 조승우, 백윤식을 비롯해 조연으로 등장하는 이경영, 김홍파, 배성우까지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한데 모여 있다. 거의 매순간 배우들의 연기가 팽팽하게 맞붙는다. 그 가운데 가장 섬뜩한 인상을 남긴 이는 단연 조 상무 역의 조우진(37)이다. 말쑥한 회사원 같은 인상으로 등장해 건달 안상구(이병헌)의 손목을 썰라고 지시하는 남자. 마치 부하 직원에게 결재 서류를 고쳐오라고 하듯, 건조하고 피곤한 말투로 “여기 말고 여 썰으라고” 내뱉는 무시무시한 남자 말이다.

스튜디오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는 조우진은 영화 속 조 상무와 많이 달랐다. 훨씬 야윈 것은 물론이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는 모습이 아주 겸손했다. 순간, 이 배우가 그토록 무시무시한 연기를 한 사람이 맞나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오디션을 통해 조 상무를 연기할 기회를 얻었는데, 40대 중반의 대기업 중역처럼 보이려면 살을 좀 찌워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급하게 10㎏ 정도 찌웠다. 지금은 거기서 몸무게를 15㎏ 정도 뺀 상태다.”

피 튀기는 한국영화를 한두 번 본 것도 아니요, 소름 끼치는 살인마도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말끔한 양복을 차려입고 그림자처럼 말없이 서 있다가 결재 서류에 사인하듯 무심하고 기계적인 동작으로 남의 손목을 써는 악한은 본 적이 없다. “오디션 마지막 단계에서 우민호 감독을 만날 때, 대본에 나오지 않는 조 상무의 과거를 나름대로 상상해 적어 갔다. TV 드라마 ‘모래시계’(1995, SBS)의 보디가드 백재희(이정재) 같은 인물을 떠올렸다(웃음). 어릴 적 소년원을 들락거린 그를, 한국 최고의 대기업을 운영하는 오 회장(김홍파)이 거둬 살인 병기로 키웠다는 식이었다. 우민호 감독이 보더니 ‘너무 구구절절해, 이거 아니야’라고 하더라. 허허허허.”
대신 우 감독은 그에게 사진을 몇 장 보여줬다. 대기업 회장들이 중요한 행차를 하는 순간 그 곁을 지키는 임원들의 모습이었다.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은 정갈하고 귀티 나는데, 인상이나 표정은 아주 평범하더라. 웬만해선 고개를 들지 않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가 조 상무란 인물에 대해 갈피를 잡은 순간이었다.

1999년 연극 ‘마지막 포옹’으로 데뷔해 2007년부터 영화와 TV 드라마로 활동 영역을 넓힌 조우진은 TV 드라마 ‘기황후’(2013~2014, MBC), 영화 ‘관능의 법칙’(2014, 권칠인 감독) 등에서 작은 역할을 맡아왔다. 그는 ‘내부자들’의 조 상무를 연기한 시간이 충격의 연속이었다고 돌이킨다. “평소 동경해왔던 배우들과 함께 작품을 하게 된 것도 벅찬데 이렇게 비중 있는 역할을 맡다니, 서울예대 연극과에 합격했을 때만큼이나 얼떨떨했다. 조 상무 역을 맡긴다는 우 감독의 전화를 받고서 한참동안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배우들이 다 모여 대본 리딩을 하고 있었다. 다시 눈을 떠보니 조 상무가 안상구를 고문하는 장면을 찍고 있더라. 안상구 역을 맡은 이병헌 선배가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덜덜 떨고 있었다. 마치 영화에서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 것 같았는데, 그런 기분을 느낄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흥분이 계속될수록 조우진은 “과하게 연기해선 안 된다”는 우 감독의 말을 되새겼다. 그래서 투수가 스트라이크존의 가장자리부터 공을 던져 그 범위를 몸에 익히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조 상무의 캐릭터를 세공하기 시작했다. 촬영 중반, 조 상무가 안상구를 고문하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조우진의 모습을 지켜보며 세심한 조언을 하던 우 감독이 그의 연기를 모니터하다 씩 웃더니 “캐릭터 잡았네. 이대로 가자, 이제 편하게 마음대로 해봐”라며 어깨를 툭툭 쳤다. “너무 기뻐서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내게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그 순간을 회상하는 조우진의 얼굴에 다시 한 번 흥분의 열기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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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어릴 적부터 집안 어른들의 손을 잡고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게 좋았다. 그렇게 싹튼 막연한 동경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배고픈 때도 있었다. 연극·뮤지컬 무대에 서다 생활비가 떨어지면 공연에서 빠진 채 며칠, 몇 주씩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었다. “연기 안 하고 다른 일을 하면 며칠 뒤부터 몸이 아파오더라.” 연기가 좋았지만 좌절한 적도 물론 있었다. “지금까지 영화·TV 드라마 오디션을 숱하게 보면서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약하다’거나, ‘무슨 역을 시켜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었다. 하지만 몇몇 분은 오히려 그래서 좋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다양한 매체, 다양한 작품,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 말을 믿고 끝까지 가보자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다.” 그는 “배우의 삶이란 좌절과 기회가 번갈아 닥치는 파도를 타는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그 파도에 일희일비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부자들’의 조 상무 역으로 주목받고 있는 지금도 들뜨지 않도록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 중이다. “마음의 파도를 만들지 말자고 다짐했다. 괜히 우쭐대고 흥분해서 내가 아닌 모습이 튀어나가지 않도록.” 맞다. 이건 조우진이란 파도의 시작일 뿐이다. 그의 이런 다짐은 더 큰 파도가 되어 돌아와 우리를 집어삼킬 것이다. 보란 듯이.

장성란 기자 hairpin@joongang.co.kr 사진=정경애(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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