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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조영래 ⑧ 그 사람 조영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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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은 고(故) 조영래 변호사가 숨을 거둔지 25년째 되는 날입니다. 8회를 끝으로 ‘내가 본 조영래’ 시리즈를 마칩니다. 시리즈의 시작과 끝은 전적으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아 귀를 기울이며 진실된 법조인의 길을 고민했던 16명의 젊은 변호사들의 노력에 기댄 것입니다.

◆ 인터뷰한 사람들
김선수(연수원 17기) 법무법인 시민 대표, 여연심(연수원 36기)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이사, 김도희 (변시 2회), 김소리(변시 4회), 김희진(변시 4회), 민창욱(변시 1회), 박수빈(변시 4회), 안희철(변시4회), 오영중(연수원 39기), 유남규(서울지방변호사회 조영래 추모사업 TF팀장), 이기연(연수원 43기), 이주언(연수원 41기), 장품(연수원 39기), 조연민(변시 4회), 최정규(연수원 36기), 이지현(연수원 43기)

◆ 에필로그 : 인간 조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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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도빈(친구, 법무법인 다온 고문)

1학년을 데모하고 산에 다니면서 보냈는데, 가정 형편도 어려운데 이렇게 쭉 살다가는 개인적으로 어려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군대에 가기로  결심하고, 조영래에게 “3월에 군대 간다”고 통보했죠.
영래가 “군대는 무슨 군대를 가냐? 학교 다니자”고 하길래 제가 “나는 알다시피 등록금도 준비 안 돼 있다”고 했지요.

그런데 이틀 후에 영래가 학생증을 갱신해서 만들어왔어요.
“야. 내일부터 학교 와”
당시 산악부 지도교수이기도 했던 김치선(1996년 작고·노동법) 교수가 계셨어요. 학생들 데모를 뒤에서 약간 지원도 해주셨던 분입니다. 조 변호사가 그분하고 의논해서 해결해 왔구나 생각했죠.

조영래는 75년 전후, 전태일 평전 집필 과정에서 청계피복 노동자였던 신순애를 자주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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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순애(「열세 살 여공의 삶」 저자)

‘아, 사람이 저런 거구나’하고 느낄 정도로 사람 냄새가 물씬 났죠.

처음 본 지 얼마 안 됐을 때 저 더러 “병원에 한 번 가보라”고 그러더라고요. 제가 안 가고 있으니 만날 때마다 “병원 한 번 가보지.”

지금은 2000~3000원하는 엑스레이가 그때는 8000원이었어요. 의료보험이 안 됐으니까. 한 달 월급이 9000원인데 엑스레이 한 번 찍는 게  쉽지 않았거든요. 어쩌다 병원에 가면 “쉬라”고만 했죠. 속으로 ‘이 사람(조 변호사)도 그런 사람이구나’하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죠.

그런데 내가 계속 병원 안가는 게 불편하셨나봐요. 어느 날은 “이번 일요일엔 광화문 어디 제과점에서 보자”고 하셔서 갔더니 어떤 여자분하고 둘이 얘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인사를 할까 말까 주뼛주뼛하는 걸 보시더니 “이리로 오라”고 그러셨어요. 알고 보니 그분이 의사였어요. 내과 의사. 일부러 저를 보게 하려고  데리고 나온 거였죠. 그것도 평화시장에서 가까운 이대 병원 의사를 섭외해서 나왔던 거예요. 김매자 선생님.

“의사시험에서 최고 점수로 합격해 대통령상을 받아야 될 사람인데 긴급조치 9호에 걸려 못 받았다”그러면서 가보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래도 또 안 갔더니, 이번엔 이소선 어머니가 또 “너 왜 아저씨가 병원 가라고 그러는데, 안 가냐?”고. 결국 가서 엑스레이 찍으니까 결핵이더 라고요. 그 분이 “약국에서 약 사오라”고 하셔서 제가 약 사갖고 응급실에 가면 그분이 와서 이제 주사만 놔주시고 매일 그렇게 했어요. 병원 차트 없이 치료를 해주셨죠. 그렇게 결핵을 완치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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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여사와 민종덕

77년도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씨가 구속됐습니다. 조영래는 “노동자의 힘으로 어머니를 찾으라”는 말을 남겼고, 청계피복노조는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노동자 민종덕은 3층에서 투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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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종덕(전 청계피복노조위원장)

허리 부러지고 팔도 부러지고 그랬었죠.  3층 높이라는 말씀을 듣고 조 변호사님이 “저 정도 높이면 어느 정도 다쳤을까” 하면서 굉장히 걱정을 하셨어요. 수배 중이니 직접 찾아올 수 없어 고민하시다가 인편에 소꼬리를 보내주셨어요. 소꼬리를 그때 처음 먹어봤습니다.

그리고 세브란스 병원에 어떤 외국인 의사님이 계셨어요. 그분을 저희 집까지 보내주기도 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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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평(전 판사, 경북대 로스쿨 교수)

술집에서 피아노를 치는 분이 계셨는데, 그 피아노 치는 걸 굉장히 즐겨 들었어요. 그 피아니스트는 생계를 위해 술집 한 곳에만 피아노를 칠 수는 없잖아요. 여러 군데를 돌아다녀서… 조 변호사하고 우리 일행들은 A라는 술집에 가서 피아노 연주를 듣다가 그분이 B라는 술집에 가면 또 얼른 옮겨가지고 가서 또 듣고.

나중엔 그 아가씨가 피아니스트로 좀 성장할 수 있게 리사이틀을 준비해 준다고 하는 말도 들은 기억이 나네요.

당시 판사였던 정영일·홍기종 이런 분들, 당시 월간조선 조갑제 기자... 조갑제씨는 그때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를 출간할 무렵인데, 지금 하고는 성향이 많이 달랐습니다.  사회 약자들에 대해 관심이 깊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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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민(변호사)·안영도(변호사)

박 :  우리 사무실이 아지트였어요.

안 : 아니, 마작은 안 해요. 고스톱밖에 안 쳤지.

박 : 간혹. 트럼프, 포카.

안 : …조 변하고 여러 사람들이 많이 왔어요. 그때는 검사·판사들도 오고….

박 : 그 친구들은 어쩌다가,

안 : 그런데 조 변호사는 제가 볼 때는 별로. 고스톱에 대해선.

박 : 실력 없어.

안 : 실력이 없더만. 그런데 꼭 한다고. 그런데 조 변의 고스톱 스타일이 뭐냐면 왜 하수들 스타일 있잖아요? 판이 끝날 때까지...

박 : 광 안 내줘.  광 안 내줘.

안 :  광을 절대로 안내요. 그러니까 같이 치는 친한 친구들이 “야, 인마 팔광 내놔” 이러면 조 변호사가 “어? 어떻게 알았지?” 이랬죠. 그 수준이야. 아이고 그런데도 열심히 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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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우(변호사)

얘기하기 조심스러운데, 조영래는 리버럴(liberal)에 속합니다. 그리고 철저한 휴머니스트예요. 조영래의 이념이나 사상을 한 마디로 얘기하라면 휴머니스트란 말밖에 할 수가 없어요.  좌우 이렇게 편 가르게 하는 이념적인 이분법을 조영래한테 적용하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투철한 휴머니스트인 거는 더 말을 보탤 여지도 없지만, 그 이상 아주 세속적인 이념이라는 잣대로 조영래의 사상을 어디 한 군데로 가두려는 건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극단적인 생각에 함몰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도그마도 배제하고 편견도 배제하는 그런 폭넓은 사고를 하는 친구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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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수(법무법인 시민 대표)

후배 변호사나 직원들한테 큰소리 내는 걸 전혀 못 봤습니다. 조 변호사님은 후배에게 일을 맡기면 완전히 다 넘겨서 알아서 하라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조 변호사님의 대중연설을 들어보진 못 했습니다. 일대일로 대화를 하거나 수명이 논의를 할 때는 상당히 설득력 있게 말했습니다. 아주 '달변가'라기 보다는 진정성을 가지고 진솔하게 얘기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고 투박하게, 하지만 상대방이 진정성을 느낄 수 있게….

승소 가능성에 대해선 보수적으로 말하는 편이었습니다. 의뢰인에게 ‘쉽지 않은 싸움이다’라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시작하자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사건의 사회적 의미가 수임의 1차적 기준이었습니다. 객관적 승소 가능성은 다음 문제였죠.

남대문 사무소 막내 격인 김한주 변호사에게는 “변호사는 평생 해야 되는 마라톤과 같으니 너무 자기 일처럼 해선 안 된다”고 했다더군요. 본인이 그렇게 못했기 때문에 한 말 아니었을까요.  정작 자신은 사건에 몰두해 너무 힘들게 했기 때문에 후배들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국제그룹 해체 사건을 맡은 뒤엔 호텔방에 들어가서 며칠간 집중해서 기록을 보고 서면을 썼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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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표(직업운동가 · 현 뉴스바로 대표)

제가 왜 조영래를 ‘도인’이라 그러느냐.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 그걸 이루려는 집요한 노력, 그리고 절대 겸손. 이게 도인 아닌가요. 조영래는 그래서 똑똑한 사람입니다.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갖은 사람. 참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건 그런 의미입니다.

[동영상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인물을 말하다_조영래편']

정리   임장혁 기자 im.janghyuk@joongang.co.kr
편집   박가영 기자 · 김현서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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