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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천 학살, 탄핵 반발 … 명분 있을 때만 ‘총선 대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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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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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당사 1. 2000년 총선의 민주국민당

[뉴스 속으로] 탈당, 성공과 실패의 역사

‘반 이회창’ 깃발 들고 만든 민국당
김윤환·조순 등 중진들 대거 낙마

신·구주류 대립 속 창당 열린우리당
노무현 탄핵 반사이득에 과반 획득

 “당이 어디고? 우짜든동(어쨌든) 한나라 공천 받아서 온나!”

 2000년 16대 총선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 출마했던 박찬종 변호사는 11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기분 나쁜 일이다. 의미 없는 창당이었다”며 당시 얘기를 꺼냈다. 그는 “‘사람만 보고 뽑아달라’고 해봐야 ‘한나라당 공천 받아서 오라’는 말만 돌아왔다”고 말했다.

 민국당은 16대 총선을 한 달 앞둔 2000년 3월 창당했다. 한나라당 탈당파인 당시 김윤환·조순·신상우 의원, 이수성 전 국무총리, 이기택·김광일 전 의원 등과 새천년민주당 탈당파인 김상현 의원 등 1·2당의 거물급 중진들이 대거 참여했다. 박찬종 변호사와 재야민주화운동가 장기표씨까지 합류했다.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이회창 총재체제였다. 이 총재는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DJ) 전 대통령에게 패했지만 야권 내 ‘대세론’은 여전했다. 2002년 대선 ‘재수’를 앞두고 확실한 자기 세력이 필요했고, 개혁을 통해 명분을 만들어야 했던 그는 16대 총선에서 대대적인 물갈이 공천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이 총재의 ‘정치적 은인’으로 불렸던 김윤환 전 의원까지 지역구(구미)를 내줘야 했다. 민국당은 김 전 의원처럼 이 총재의 공천장을 받지 못한 세력이 ‘반창(反昌) 연대’의 깃발을 내세워 급조한 당이었다.

 결과는 참패였다. 지역구 1석(한승수·춘천)과 비례대표 1석이 전부였다. 박 변호사는 “선거 중반까지는 꽤 위협을 줬지만 처음으로 DJ에게 정권을 내줬던 영남 민심은 더욱 강하게 한나라당으로 결집했다”고 회상했다.

공교롭게도 분당 위기의 새정치민주연합과 닮은 점이 있다. 이 총재는 국무총리와 여당의 대선 후보를 거쳤지만 96년 15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1번으로 국회에 입성한 초선이었다. 이 총재처럼 대선 재수를 노리는 문재인 대표도 초선이다. 또 내년 총선을 앞두고 ‘혁신공천’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안철수 의원이 탈당해 천정배·박주선 의원 등과 손잡는 시나리오도 나온다. 하지만 결과까지 똑같진 않을 듯하다. 당시 민국당은 실패하고, 한나라당 공천 개혁은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하지만 야당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경우 결과는 ‘공멸’(共滅)이라는 게 친문이나 반문(反文) 진영의 공통적 생각이다. 물론 총선사를 보면 탈당파가 성공한 사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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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당사 2. 2008년 총선의 친박연대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이명박(MB) 대통령의 취임 첫해인 2008년 3월 23일. 당시 한나라당 비주류 박근혜 의원이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렇게 말했다. 한 달 뒤 치러질 18대 총선을 앞두고서였다. 그는 “무원칙 공천에 대해 대표와 지도부가 책임져야 한다”며 “지원 유세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기자회견 일주일 전, 한나라당은 전국 245개 지역구 공천에서 현역 의원 109명 중 42명을 탈락시켰다. 낙천자 42명 중 박근혜 캠프 좌장을 지낸 김무성(현 새누리당 대표) 의원, 서청원·이규택·김재원 의원 등 친박계가 16명이나 포함됐다. 공천자 중 친이계 성향 후보자는 157명, 친박 성향은 44명에 불과했다. ‘친박 학살’이란 평가가 내려졌다.

 김무성·서청원·홍사덕 등 낙천한 친박 의원들은 집단 탈당했다. 현 새누리당 서청원 최고위원은 당시 ‘친박연대’라는 정당을 만들었다. 당명에 성(姓)을 표기한 희한한 상황이었다. 김무성 의원은 ‘친박 무소속 연대’를 결성했다. 박근혜 의원은 한나라당에 남았지만 “살아서 돌아오라”며 탈당파들을 격려·지원했다.

 총선에서 친박연대는 지역구 6석, 비례대표 8석 등 14석을 얻었다. 홍사덕(대구 서)·박종근(대구 달서갑)·조원진(대구 달서병)·서청원(비례대표)·김을동(비례대표) 의원 등이 당선됐다. 정당투표에서도 친박연대는 13.3%를 획득해 충청도에 기반한 자유선진당(7.5%)의 두 배가량을 득표했다. 김무성(부산 남을)·유기준(부산 서)·한선교(용인 수지)·이해봉(대구 달서을)·이인기(칠곡-고령-성주)·김태환(구미을) 의원 등 친박 무소속 후보도 12명 당선됐다.

 이들은 한나라당 친이계 지도부와의 줄다리기 끝에 순차적으로 복당에 성공했다. 살아서 돌아온 이들의 상당수가 현재 새누리당 지도부를 이루고 있다.

 당시 친박연대 원내대표를 맡았던 새누리당 노철래 의원은 “차기 대선 후보 지지도가 이미 50~60%에 달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존재와 그를 대리했던 다선의 서청원 의원의 존재 때문에 선거 전 꾸려진 당이었지만 성공할 수 있었다”며 “과거 ‘허주’(김윤환 전 의원의 호)처럼 실패할 거란 말도 있었지만 2008년 총선 때 MB가 주도한 공천은 너무 심하다는 데 국민적 공감이 있어 민국당 창당 때완 달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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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당사 3. 2004년 총선의 열린우리당

 “사실은 탄핵 때문이지….”

 열린우리당의 의장을 맡았던 이부영 전 의원의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 첫해이던 2003년.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김근태·정동영·천정배·정세균·신기남·문희상·원혜영·송영길 의원 등 40명과 유시민 의원 등 개혁국민정당 세력, 한나라당을 탈당한 ‘독수리 5형제’로 불렸던 이부영·이우재·김부겸·김영춘·안영근 의원 등이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47명짜리 ‘초미니 여당’이었다. 그런 열린우리당이 2004년 4월 총선에서 대박을 쳤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문이었다.

 총선 한 달 전인 그해 3월, 한나라당과 민주당(열린우리당 창당에 반대한 잔존세력)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 통과시켰다. 탄핵안이 통과되면서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들려 나가는 장면이 하루 종일 방송된 직후 역풍이 불었다. 탄핵에 반대하는 촛불시위 속에서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152석으로 과반 의석 확보에 성공했다. 국회 의석이 단숨에 105석이나 늘어났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의미 있는 신당이 만들어지려면 강력한 대선주자(친박연대)나 강력한 지역 기반 또는 대통령 권력(열린우리당)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차지한 과반 의석은 결과적으로 독(毒)이 됐다. 과반 정당이 3년 만에 공중분해 됐다. 이부영 전 의원은 “‘108 번뇌’라고 불리던 초선 108명이 대통령만 쳐다보면서 정치를 하니까 당의 위계도 없어지고 독선으로 흘러버렸다”고 말했다. 2007년 대선 국면에서 당을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정동영 전 의원 등이 탈당해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계, 민주당계와 손잡고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변신해 오늘(새정치민주연합)에 이르고 있다.

 그 새정치연합이 다시 분당의 문턱에 있다. 문 대표와 안 의원이 접점을 찾지 못하면 익숙한 장면이 다시 벌어질 수 있다. 안 의원 탈당 시 문 대표 체제에서 공천을 받기 어렵다고 판단하는 비주류 의원들이 우르르 따라 나갈 수 있다는 예상이 나온다. 그러나 그게 열린우리당의 길일지, 친박연대의 길일지, 민국당의 길일지 제 4의 길일지는 아직 예단하기 어렵다.

강태화·이지상 기자 thkang@joongang.co.kr

[S BOX]지지세력 ‘동반 이사’ … 파괴력 컸던 YS·DJ 탈당

야당 대선주자로 꼽히는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의원은 현재 탈당을 검토하고 있다. 대선주자들은 대부분 탈당 경력을 갖고 있다.

 만약 안 의원이 탈당하면 얼마나 따라나올지 불투명하다. 파괴력이 가장 컸던 건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의 탈당이었다.

 YS는 1987년 신한민주당을 탈당해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DJ도 동교동계를 끌고 나와 통일민주당에 입당했다. 현역 의원 90명 중 74명(상도동계 40명, 동교동계 34명)이 따라나왔다. YS와 DJ의 탈당과 출마는 ‘출마용 창당’이 아닌 지지세력의 ‘동반 이사’에 가까웠다. 탈당 시 YS, DJ만 한 세를 모으지 못하면 대부분 기호 3번 이하로 대선에 출마해야 한다.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한 1987년 이후 기호 3번 이하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예는 아직까지 없다.

 현 새누리당 이인제 최고위원이 97년 대선 때 국민신당을 창당해 기호 3번으로 대선에 출마했다가 19.2%(3위)를 얻었다. 정주영 통일국민당 후보(92년, 기호 3번)는 16.3%를 득표했다. 기호가 내려갈수록 득표율은 더 저조했다.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2007년, 기호 6번)는 5.8%에 그쳤다. 87년 이후 기호 4번 이하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후보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였다. 그는 2007년 세 번째 대선 도전에서 15.1%(3위)를 얻었다. 당시 무소속으로 출마해 기호 12번을 받았다.

강태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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